어서와, 남미는 처음이지?
지구 반대편에서의 첫 사회생활,
2021년 봄, 그토록 고대해왔던 인턴십에 합격했다.
이전 기수 지원 때 고배를 마셨던 터라, 또 한 번 모집을 한다면 왠지 붙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벼르고 있었는데 역시나 합격해서 뛸듯이 기뻤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스페인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간직해 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실천하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남지만, 아마 그럴 만한 명확한 동기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스페인어 전공자도 아닌 그저 타성에 젖어 살아가던, 심지어는 영어조차도 쓸 기회가 잘 없는 대학생이 갑자기 스페인어가 웬말인가? 외국어 학습 어플로 매일 야금야금 수박 겉핥기 식으로 생활회화를 익히던 게 현실을 딛고 조금이나마 내 소망을 실현하고자 선택한 길이었다.
국제개발협력에 관심 있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국내 공공기관. 아마 굳이 이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검색만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기관은 전세계 44개국에 해외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그곳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다는 건 스페인어와 국제개발협력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개발협력계에 눈을 뜨고, 여느 취준생들과 다름없이 직무경험에 목말라 있던 나는 그렇게 이 인턴십에 두 번이나 도전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지원과정에서 나는 한 번 더 현실에 순응한다. 스페인어는 아직 어학성적도 없고 내 실력을 나도 잘 모르니, 일단 어학성적이 있고 스페인어보단 자신 있었던 인도네시아어를 우대조건으로 내세운 동티모르를 1지망 국가로 지원한 것이다. 정말 지금 봐도 좀 뜬금없는 조합이다. 동남아에서도 최빈국으로 꼽히는 작은 나라 하나와, 나머지는 지구 반대편의 중남미 국가들. 영어 면접 때 면접관이 "지원한 국가가 왜 이렇게 전세계에 흩어져 있니?"라고 질문한 게 이해는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 합격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동티모르에 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 길이 없는 내부사정으로 인해 파견 사전 교육 말미쯤 에콰도르를 거쳐 파라과이로 최종 재배치되었고, 이는 오래간 간직해온 남미 땅과 스페인어에 대한 동경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 되었다. 오히려 좋아!
요즘 젊은이들 인생에선 뭐든 그런 것 같다.
대외활동 하나, 인턴경험 하나하나가 너무도 소중하기에 일단 '합격'만 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은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물론 합격 자체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은 맞지만, 사실 본게임은 비로소 그때부터 시작이다.
최종합격 이후, 본격적인 파견 준비가 시작되었다.
특히 우리 기수부터는 한국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출국해야 했기에, 외교부와 질병청 당국이 우리의 백신 우선접종을 허락해줄지, 언제 허락해줄지가 우리의 파견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예정이었다.
파라과이 입국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고, 기관 본부에 제출하는 일상들이 이어졌다. 나름 준비랍시고 스페인어 공부에도 좀더 박차를 가했고, 무려 1년을 생활해야 하는 짐을 어떻게 준비할지도 열심히 고민했다. 그러다 출국 한 달 전쯤 백신 접종 일정이 나와서 출국 3주 정도 전에 2차 접종까지 완료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떠나기 전 가장 신경을 쏟은 부분은, 가족 및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난 어쩔 수 없는 SNS 중독자라, 내가 곧 파라과이로 떠난다는 사실은 절친한 친구이든 따로 만난 적도 없는 그냥 지인이든 모두가 알게 되었고 많이들 "가기 전에 만나자"고 제안해 주었다. 실제로는 1년도 넘게 안 만나고도 잘 살아왔지만, 괜히 1년 동안 없을 거라고 하니 갑자기 만나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이건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라도 얼굴 보고 사는 거지 뭐.
최종적으로 확정된 항공일정을 받아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어릴 때 갔던 뉴질랜드 홈스테이, 대학교 1학년 때 간 대마도 가족여행,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의 인도네시아 해외봉사를 제외하고는 해외경험이 전무했다. 그 흔한 교환학생이나 '휴학 하고 알바 해서 유럽여행', 심지어는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 여행 경험도 없었다. 그런 나의 손에 들린 '인천-애틀란타-산티아고-아순시온'의 루트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여정이었다. 함께 가는 인턴 동기들이 있으니 망정이지, 나 혼자 가야 했으면 떨리고 걱정돼서 잠도 못 잤을 거다.
뭐, 남미 별거 있겠어?
이런 무대뽀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군다나 주변에선 '중남미라니..! 너무 위험한 거 아냐!?' 라는 걱정 또는 오해로 점철된 말들을 잔뜩 듣던 중이었기에 일단 나부터 침착해져야 했다.
한창 짐 패킹에 박차를 가하던 출국 3-4일 전, 집 에어컨이 고장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민가방에 내 살림살이들을 정리했다. 사실 이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시기에 생긴 내 단짝을 두고 1년을 떠나 있어야 하니 그 마음도 정말 헤아릴 수 없이 우울하고 막막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씩씩하게 이겨내야 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기회였잖아!
2021년 7월 28일 수요일, 드디어 출국길에 올랐다.
아침 일찍부터 부모님과 함께 집을 나서 공항으로 향했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일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모두와 작별을 하고, 씩씩하게 출국장으로 들어가 동기들을 만났다. 1년을 함께 하게 될 또래 친구들. 앞으로 많이 의지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온몸이 녹아내릴듯 뜨거웠던 애틀란타와 창밖 저멀리 보이는 산이 인상적이었던 산티아고를 거쳐, 약 40시간에 달하는 비행 끝에 우리는 아순시온에 도착했다.
현지 기준으로 2021년 7월 29일. 한국보다 반나절 느린 미지의 땅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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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아순시온] 7월호 : 미지의 땅으로
어서와, 남미는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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