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한 것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드 Aug 28. 2023

나도 공무원 그만뒀었는데

휴직기간 제외 1년 4개월 만에 공무원을 때려치웠던 MZ세대 이야기

요새 심심하면 브런치스토리 메인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살펴본다.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들이 올라와 있는데 퇴사, 그중에서도 공무원/공직 퇴사와 관련 있는 글이 많이 보였다. 많은 사람이 몇 년씩 준비해서 합격하려고 하는 공무원 시험을 통과해 놓고 그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니 그 사연이 궁금할 것 같다. 나 역시 그에 관해선 할 말이 있어 적어보려 한다.


나는 2019년 약 11개월간 9급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여 경기도의 A시에 일반행정직으로 합격하였다. 필기시험은 무료 강의로 준비했고, 행정학 한 과목이 부족하여 다른 서비스의 패스 상품을 결제했으나 그것도 빠른 합격으로 인해 수기 작성 후 환급받았다. 물론 면접은 유명 학원의 특강을 들으며 준비하긴 했지만 의식주를 제외하면 나의 공무원 시험 순비용은 100만 원 남짓이지 않을까? 아주 경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지방공무원이자 9급 일반행정직이 처음 임용되어 맡는 일은 행정복지센터(동사무소)의 민원 업무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가 발령받은 곳은 A시에 있는 수십 개의 동 중에서도 절대적인 민원 양이 TOP 3 안에 들고, 무엇보다 어디에서도 모를 특이 케이스들이 너무 많아 까다로운 곳이라고 했다. 근무하고 계시던 7급 주무관님이 그곳에 처음 왔을 때 주변에서 무슨 사고를 쳤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니 그 격무 수준이 짐작되시리라. 


민원 업무는 게을리하고 요령을 피우면 바로바로 눈에 띈다. 일을 안 하면(번호표를 누르지 않으면) 내 앞이 비고, 순번을 기다리는 민원인은 나와 열 발자국도 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 정도만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얼얼해질 정도로 일을 해야 한다. 변변한 청사 건물도 없어 모 건물에 가건물을 얹힌 형태였던(...) 그곳엔 매일 약 200명, 그러니까 일주일에 1,000명이 방문했다. 정말 바빴다. 보통 민원대에 4명만 있어도 많은 형편인 상황에서 나는 일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성실 인간이라, 다른 고유 업무가 있는 선배들을 배려하는 뜻에서 최선을 다해 번호표를 쳐냈다. 당시 내 책임감은 좀 지나쳤던 것 같다. 아빠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았다는데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나와는 아무런 협의 없이 업무 강도가 상당한 일을 추가로 떠맡게 되는 쪽으로 업무 분장에 변화가 생겼다. 나이가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해외에서 한창 코로나가 유행일 때 벌어진 선거에서 투표 시간 마감 뒤 격리가 풀리지 않은 해외입국자들의 투표를 진행해야 했고, 10만 원을 받기로 했던 위험수당이 구 선관위의 일방적인 결정(예산이 부족했단다)으로 4만 원 깎였다. 민원인으로부터 인격을 업신여기는 언사도 많이 들었고, 명절 연휴를 반납당하거나 주민 학예회 같은 행사에 강제 동원되어 4시간 이후의 휴일근무수당은 받지 못했으며(규정상 휴일 수당은 4시간만 청구할 수 있고 그 이후는 어찌 됐든 무료봉사가 된다), 폭우로 인한 비상근무를 서느라 간이침대도 없는 청사에서 밤을 새우고 곧장 9시부터 6시까지 민원대에서 풀근무를 했다. 그래도 월급은 채 200만 원이 되지 못했다. 


공무원 일을 시작하고 2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일이 일어난 시점은 아니었으나 내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잠을 자지 못했다. 심근경색을 겪었던 아빠 말고 엄마도 심장 쪽으로 문제가 있어서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심장 초음파와 심전도 검사를 했다. 그러나 뚜렷한 이상 반응이 나오지 않았고, 의사는 정신건강의학과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약을 먹으며 잠을 청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처음엔 신경안정제를 일종의 수면유도제처럼 챙겨 먹다가 거기에 항우울제가 추가되었다. 인사고충 글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의사를 만날 때마다 엉엉 우느라 말을 못 하는 지경이 된 끝에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병가'라는 것을 내보았다.


한 달 반을 쉬고 돌아오니 내가 보기보다 상태가 안 좋았음을 고려해 주었는지 상의 없는 업무분장 문제는 해결되었다. 나는 다시 성실하게 일에 매진했다. 그 당시 여전히 코로나는 무서웠고 몰려드는 민원인 수는 조금도 줄지 않았으며 대민업무라는 일의 특성에 묶여 재택근무는 꿈도 못 꿨지만 마침내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시청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9급이 8급으로 승진할 때는 구청으로 가는 게 보통인데, 같은 급수가 3명 있던 행정복지센터에서 나만 시청으로 갔다. 나는 그때 시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내가 시청에 가서 해야 하는 일은 수천 명이 근무하는 그 커다란 시에서 단 3명밖에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하는 일을 예전에 해본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게 전문가가 아닌 일반가로서 공무원이 조직 내에 누릴 수 있는 장점인데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차석도, 팀장님도, 과장님도 내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법률로 정해진 기한이 있었는데 그전 데이터들이 엉망진창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까마득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나를 도와주려 노력하시던 선배는 과장님과의 불화 등으로 내가 온 지 1달 남짓 되었을 때 휴직을 내고 사라졌다. 같은 건물에 있지도 않은 전임자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는 다시 여기저기서 숨죽여 울면서 부정출혈과 불면증, 출근길의 호흡 곤란, 자살 충동 등에 시달렸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부 녹은 받지 않겠다'라고 얘기하던 아이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게 초등학교 1, 2학년인데, 대체 무슨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정부 돈을 받는 건 싫다고 했던 건 분명히 기억난다. (참고로 내 별명은 '애늙은이'였다.) 공무원 시험도 내가 준비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다. 예전부터 교사 혹은 공무원이 되라고 하던 부모님이 내가 신체적인 직업병(번역가로서 나는 팔과 손가락에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으로 고생하고 있자, 한 번만 도전해 보라고 끈질기게 권유하는 걸 더는 무시할 수 없어서였다. 암기 공부는 조금 자신이 있었기에 시험에 붙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내 예상은 맞았지만 나의 내면적 특징과 타고난 영혼을 고려하지 않고 외부 사정만 따진 전직은 결과적으로 나를 병들게 했다. 나는 사람을 특별히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 데다 창의적이고 감수성 있는 무언가를 선호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8급 승진을 앞두고 나는 잠깐의 질병휴직 뒤 공무원 일을 그만두었다. 그 결단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던 건 이런 마음가짐이었다. 이딴 일을 끝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는 것. 나의 마지막이 공무원으로 끝나는 건 싫었다.


이것저것 길게 늘어놓았지만 내가 아주 부당하거나 끔찍한 일을 겪어서 공무원을 그만둔 건 아니다. 지금도 나를 죽이려 했던 A시 시청이 있는 곳엔 별로 가고 싶지 않지만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약은 끊고 회사 다니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 공무원에서 해방된 뒤 그때보다 더 심한 격무와 스트레스를 겪었던 시기에도 나쁜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걸 봐서, 공무원은 정말 나의 본질과 맞지 않은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공무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한다.


일과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진작에 지나갔지만, 혹은 그런 시대는 지금까지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내 존재 자체와 너무 엇나가는 일은 하지 않는 게 맞는 것 같다. 자신의 근원, 근본은 타협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p.s. 그래도 공무원에 도전하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지방직 말고 국가직에 합격하시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갑자기 내 인생에 찾아온 '멈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