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의 악마 # 4
정비-18팀 정비창 한쪽에는 고물처럼 방치된 중형급 우주정이 하나 있었다. 엔진이 완전히 망가져 폐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걸 자주 쓰는 부품을 쌓아두는 간이 창고로 썼다. 로건은 그 폐화물선을 '골방'이라고 불렀다. 짬이 날 때, 로건은 그 화물선 조종석에 앉아 멍하니 대시보드를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여자의 사진이 그 위에 있었다. 나는 로건에게 할 말이 있어서 골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그 사진을 보게 됐다. 로건은 사진에 앉은 먼지를 정성스럽게 닦아내고 있었다. 짧은 커트 머리에 갸름한 얼굴, 눈이 크고 코는 아담했다. 로건은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숙소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중에 옆 팀 동료에게 사연을 듣고 궁금증이 해소됐다.
로건의 여자 친구는 팔년 전 유성우 대공습 때 로건의 집에 있다가 목숨을 잃었다. 로건은 당시 화물선 조종사였다. 그날 새벽 호출을 받고 예정에 없던 화물 운송을 나갔다가 죽음을 피했다. 그녀의 죽음은 로건의 책임도 회사의 책임도 아닌 재난이었다. 그러나 로건은 그 일을 기억에서 떨쳐버리지 못했다. 돈을 더 많이 받는 조종 일을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로건이 항상 곁에 두고 바라보는 사진을 보며,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억한다는 것 - 더는 여기에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존재를 추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곱씹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어금니가 부러질 걸 걱정해야 할 정도로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각진 턱, 약간 굽어진 목, 슬픔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푸른 눈을 조금은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로건은 가끔 조이에게 힘쓰는 일을 거들도록 할 뿐 본격적인 업무를 배당하지 않았다. 말을 걸지도 않았다. 당연했다. 내가 아는 로건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그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한 껍질 안에 스스로를 가둔 존재였으니까. 로건에게 조이는 레오에게 했던 것과 딴판인 태도를 보였다. 자기가 무슨 요조숙녀라도 되는 것처럼 거리를 뒀다. 팔을 뻗었을 때 닿을 거리 안으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군말 없이 시킨 일만 했다. 아마도 감시카메라에는 그렇게 기록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조이의 시선은 많은 경우, 로건을 향하고 있었다. 손으로 레오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눈으로는 로건의 움직임을 쫓았다. 액체 메탄 카트리지를 양 어깨에 걸쳐 나르는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훔쳐봤다. 그건 내 눈에, 영락없는 교태로 보였다. 구역질이 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조이의 태도가 로건에게 통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로건은 나와 여러 번 신체 접촉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돌덩어리처럼 차가웠었으니까. 그런데 내 예상과 달랐다. 시간이 흐르자, 반응이 있었다. 조이를 대하는 로건의 태도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듯했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미묘하게 달랐다. 로건도 가끔 조이를 바라봤다. 묵직한 미소를 머금고. 조이를 바라보는 로건을 발견하면 나는 심술궂게도 꼭 말을 시켰다.
“조이가 잘하지?”
그때마다 로건은 한눈을 팔다가 본처에 들킨 남자처럼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네. 잘하네.”
혹시 조이의 눈에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전자기파가 발사되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조사와 ㈜옥토끼는 조이를 실험하기 위한 대상을 정말 제대로 고른 거였다. 여태껏 괜찮은 동료로 여기고 지내왔던 레오도 로건도, 결국 답 없는 수컷들이었다. 본능적으로 여자의 외형을 가진 존재에 끌리는, 성적 욕망을 참아내지 못하는, 현재 그 욕망을 해소할 대상이 없는, 그래서 뼈와 살이 아니라 쇠붙이와 플라스틱을 보기 좋게 엮어놓은 로봇이라도 상관치 않고 달려드는, 조이에게 걸려들기에 아주 적당한 수컷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 역시 다를 게 없었다. 그들에게 훌륭한 실험 대상이었다. 일종의 실험 비교군이라고 할까. 그들은 나 또한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몇 가지 조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갑자기 찾아온 불면증이었다. 눈을 감으면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땀이 흠뻑 나도록 자기 전에 윗몸 일으키기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 별들이 몇 개나 되는지 세는 것도 도움이 안 됐다. 나는 잠을 청하다 지쳐 숙소 구역 중앙 광장에 나갔다.
태양은 남극에서 내내 지평선 근처를 배회할 뿐 그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중앙 쿠폴라(Cupola)에서 바라본 하늘은 전원이 나간 모니터처럼 그냥 새카맣기만 했다. 올해는 어떻게든 휴가를 내서 저위도 지역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별의 날들’, 그러니까 지평선 위로 해가 올라오지 않아 밤이 계속되는 시기에 고요의 바다로 가 보고 싶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빛의 보석들을 보고 싶었다.
일주일 넘게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자 겁이 났다. 뇌신경 하나하나가 바늘에 쿡쿡 찔리는 것 같은 두통이 왔다. 낮 동안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레오의 집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취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잠을 자지 못하면 큰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정비창에는 위험한 물건이 많았다. 연료로 쓰는 메탄 카트리지가 터지면 우리가 일하는 공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나는 숙소에 돌아가 생체실험을 감행하는 사람처럼 물과 50대 50 비율로 섞은 에틸알코올을 한 컵에 가득 부어 마셨다. 효과는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걸 마신 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잠들었다. 잠들었다기보다, 정신을 잃었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정비창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장이 기이했다. 거의 투명에 가까운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민망하게 내 몸의 곡선이 전부 드러나는 옷이었다. 나는 언더그라운드 셔틀을 탔다. 평소 같으면 꽉 들어찼을 승객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뿌연 수증기 같은 것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릎 아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공간에 가득한 수증기가 구름을 손으로 젓는 것처럼 밀도를 달리하며 흔들렸다. 무언가 내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눈도 입도 달리지 않은 환형동물이었다. 뜻밖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카드를 대고 정비창 출입구를 열었다. 정비창 중앙의 등 하나가 켜있었다. 빛줄기가 무대 조명처럼 어둠 속에서 좁은 부채꼴을 그리며 내려왔다. 오렌지 빛깔이었다. 그 아래에 로건과 레오가 있었다. 조이도 있었다. 로건과 레오가 좌우에 섰고, 조이가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중앙에 있었다. 세 명 모두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게다가 그들의 몸이 서로 붙어있었다. 로건이 날 돌아봤다. 웃고 있었다. 어느새 나도 나체가 되어있었다. 내가 시선을 떨군 곳에 내 가슴, 밋밋한 뉴트럴의 가슴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