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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그린 Sep 21. 2023

8. 당근을 삭제했다

-하루에 하나씩, 물건과 이별하기






그러니까 당근을 삭제한 건, 베란다에 오랫동안 방치해 둔 50리터짜리 쓰레기통을 어떻게 처분할까 생각하다가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하얀색과 회색, 두 개의 쓰레기통은 언젠가 사은품으로 받은 것인데 사용하는 쓰레기통이 이미 있어서 새것 그대로 놔둔 게 벌써 2년이 넘은 것 같다.

처음에 박스 그대로 놔뒀더라면 재빨리 당근에라도 팔았을 텐데.

택배로 배송받자마자 아이가 박스와 비닐들을 모두 푸르곤 그 안에 장난감들을 잔뜩 넣어두었다.

새 물건이니까 지금이라도 팔까, 하다가 아니, 하고 생각을 멈췄다.


나는 아마도 당근 초창기 소비자일 것 같다고 생각한다.

처음 당근이라는 앱을 깔고,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다들 그런 게 있었어? 하고 놀라워했으니까.

처음에 나는 중고나라보다 판매가 더 간편하고 편리한데 이끌려서, 또 처치 곤란했던 자잘한 물건들을 당근에 내놓고 몇천 원이라도 내 손에 돈이 쥐어지는 게 재밌어서 집안 정리를 이유로, 또 목적으로 당근을 애용하고는 했다.


준비물을 깜박했으나 집 근처에서 구할 수 없을 때 당근은 정말 유용했다.

누군가 한 명쯤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새 물건보다 조금 저렴한 가격으로 냉큼 그것을 구해오며 당근을 극찬했다.

어떤 날은 내 물건을 사러 온 아주머니가 트렁크에서 과자를 한 아름 꺼내 안겨주었는데, 그게 또 내가 좋아하는 과자여서 행복했던 날도 있었다.

아이가 읽고 싶어 했던 만화책 세트가 저렴하게 나와 바로 차를 끌고 달려가 받아오며 뿌듯했던 기억도 있고, 또 내 아이가 읽었던 인기 만화책을 다른 아이 아빠가 기쁜 얼굴로 가져간 일도 있었다.

게임팩을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주고받기로 한 날, 서로 위치를 착각해 한참을 헤매다 겨우 만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서로 엄청 반가워했던 기억도 있다.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기억들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당근이 피곤해졌다.

어쩌면 사람마다 값의 기준이 나르고, 물건의 가치에 대해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 기준으로 정직하게 판 물건에 나도 몰랐던 작은 흠을 찾아내 다그치는 사람에게 학을 뗐고,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자신의 상황을 나열하며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가 찼다.

가격에 대해 이야기를 끝내 놓고, 물건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다시 가격을 후려치는 사람에게 정이 떨어졌다.


큰 금액의 물건이라면 그래, 그럴 수 있다 친다.

더 신중하게 말하고 면밀하게 판단해야겠지.

하지만 내게 있어서 당근은, 대부분 몇 천 원짜리 물건들을 주고받는 곳 일 뿐인데 거기서 얻는 득에 비해 실이 너무 컸다.


당근에서 비롯되는 감정 소비에 나는 지쳤다.  

그래서 나는 당근을 삭제했다.


당근을 삭제하고 난 후, 정말 후련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후련할까 싶을 정도로.


이제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 중 쓸만한 것들은 무조건 기부한다.

그게 꼭 당근에 비해 손해만은 아니다.

굿윌스토어의 경우 장애인 일자리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는 작은 뿌듯함이 있고,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는 기쁨이 있다. 소득공제 혜택은 물론이다.


오늘 아침에 정리한 물건 중 조금 오래된 책들은 굿윌스토어에 보내기도, 알라딘 중고서적에 팔 수도 없어 깨끗한 상자에 담아 재활용장 종이 코너 옆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잠깐 외출 후 돌아왔을 때 일부러 재활용장을 지나 돌아왔는데 상자에 있던 책 중 몇 권이 보이지 않았다.

기뻤다. 누군가가 가져가 한번이라도, 아니, 한 챕터라도 읽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쁨이다.

몇백 원, 몇천 원의 가치보다 더 큰 그런 기쁨.


베란다에 있는 휴지통은 잘 닦아 굿윌스토어 수거용 비닐에 넣었다.

이것 또한 어딘가로 가 유용하게 잘 쓰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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