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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윤 Dec 27. 2022

2022년 회고 ④ - 세계

'내러티브 자본'과 '실재감 테크'가 만드는 세계

최근 우리가 자주 듣게 된 단어가 있다. 바로 ‘세계’이다. ‘세계’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어떤 말이 먼저 떠오르는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세계화(globalization)라고 할 때의 세계일 것이다. 세계화는 오래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왔으나 지난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팬데믹은 지구촌이 얼마나 강하게 연결돼 있는가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2022년 역시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먼 땅에서 일어난 전쟁이 당장 우리들의 생활 물가에도 파장을 미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세계라는 말에서 글로벌이라는 단어까지만 떠올렸다면 조금 더 트렌드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요즘 '세계'는 발 딛고 서있는 물리적 세계를 넘어선 다양한 세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세계들에 뛰어들어 경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오늘 살펴볼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개별 주체·브랜드·스토리를 담는 그릇인 세계관(universe)으로서의 세계, 두 번째로는 기술 발전에 따라 생겨난 또 하나의 세계, 실제 세계에 대비되는 용어로 ‘가상 세계’로 불리는 세계이다. 최근 메타버스가 등장하며 기존의 ‘가상 공간(cyber space)’이 ‘가상 세계’로 진일보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이러한 ‘세계’들이 어떻게 발달하고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왔는지 여러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먼저 세계관은 정치·경제·문화 등 분야에 관계없이 중요해지고 있다.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는 잘 짜인 세계관이 힘을 얻는 현상을 ‘내러티브 자본’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 바 있다. 내러티브(narrative)는 일련의 사건들이 연결된 ‘스토리(story)’를 넘어서서 사건과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다시 말해, 내러티브를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점(세계관)을 구축한다는 의미와 같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참여시킬 수 있는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본력이 된다.


올해는 내러티브 자본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브랜드가 시장에서 빛을 발한 한 해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김씨네과일’이라는 브랜드가 있다. 얼핏 듣기에는 매우 평범한 청과물 가게의 이름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브랜드는 과일이 아니라 티셔츠를 판다. 과일 가게라는 세계관 속에서 옷에 각종 과일을 프린트해 판매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세계관을 활용한 판매 방식에 있다. 흔히 옷가게 매장에서 옷을 판매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전에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동식 과일 장수처럼 경승합차(일명 ‘다마스’)를 세워두고 플라스틱 소쿠리에 과일이 탐스럽게 보이도록 옷을 담아 판매한다. 가격표도 과일 가게에서 하듯 종이상자를 찢어 매직으로 휘갈겨 적어 둔다. 전국 각지를 돌며 게릴라 형식으로 판매하다 보니 판매 공지가 뜨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젊은 소비자들의 줄이 길게 늘어선다.

                    

옷에 각종 과일을 프린트해 마치 과일처럼 판매하는 '김씨네과일' (사진=김씨네 가게 SNS)



‘김씨네’와 같은 신생 브랜드 외에 기존 브랜드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사례도 다수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의 F&B(Food & Beverage) 영역 진출이다. 구찌의 경우, 이태원에 미슐랭 3스타 셰프의 음식을 선보이는 ‘구찌 오스테리아 서울’이라는 레스토랑을 열었고 디올은 ‘디올 성수’라는 팝업형 스토어에 카페를 열었다. 루이뷔통 역시 청담동에 ‘루이비통 메종’이라는 레스토랑을 6주간 운영했는데, 그 장소는 원래 유명 아티스트의 전시가 주로 열리던 곳이다. 이러한 명품 브랜드의 색다른 시도는 자신들의 브랜드 경험을 의류·잡화라는 상품군에 국한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관으로 승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명품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세계적으로 이름난 셰프를 기용하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던 곳에서 예술 작품 같은 음식을 제공하는 식으로 브랜드 경험을 연결 짓는다.



두 번째로 중요해진 세계는 기술의 발달로 생겨난 ‘가상 세계’이다. 이전까지 가상 공간은 인터넷 접속망을 통해(on-line) 사람들 간에 연결된다는 의미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여러 가지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장이 되고 있다. 그 기반에는 온라인 활동도 또 하나의 현실로 실재(實在)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실재감 테크’의 발달이 있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실재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음성인식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네이버 클로바’에서는 ‘엄마의 목소리를 부탁해’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캠페인 참여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몇 문장 녹음해 신청하면 그중에서 채택된 목소리를 실제 AI 보이스에서 활용할 수 있는 옵션으로 만들어준다. 이는 단발성 이벤트로 진행하고 있지만, 만약 이러한 기술이 일반화된다면 인공지능 스피커가 들려주는 아침 인사가 정형화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니라 정겨운 말투의 엄마 목소리인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AI 보이스가 더이상 기계음이 아닌 실제 사람 목소리처럼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와 같은 실재감 테크의 활용도 가능해졌다.


음성을 넘어 공간감을 더하는 메타버스는 실재감 테크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올 한 해 동안에도 메타버스에서 각종 행사를 진행하거나 업무·학습 공간으로 활용하는 등 다양한 사례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농심은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에 신라면 분식집을 차리고 소비자들이 직접 옵션을 선택해 입맛대로 라면 끓이는 과정을 체험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여기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조합의 라면을 실제 한정판 제품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많은 Z세대 소비자가 기꺼이 찾아간 메타버스 세계로 ‘낭만어부 고석길’ 전시도 눈여겨볼 만하다. SKT에서 만든 메타버스 플랫폼 ‘이프랜드(ifland)’에서 열린 해당 전시는 KBS ‘다큐3일’에 출연해 ‘낭만어부’로 알려진 고석길 선장을 주제로 다룬다. 그는 앞서 다큐에 출연했던 모습이 SNS상에서 밈 형태로 널리 퍼지면서 Z세대의 궁금증을 샀던 인물로, 전시회에 입장하면 그의 인터뷰 영상이나 반려동물 사진, 바다 사진과 시가 결합한 시화 형태의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이 전시가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전시가 열린 10월을 포함하여 이전 두 달 동안 이프랜드의 다운로드 수가 1000만에서 1200만 이상으로 200만 명이 증가할 정도였다.


메타버스 공간 '이프랜드'에 마련된 고석길 선장의 시 낭송회. (사진=SKT)




그렇다면 앞으로 각양각색의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까? 전술한 ‘낭만어부 고석길’전 사례에서 그러하듯, 결국 세계를 구현한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어떤’ 세계를 구현해 사람들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어디서나 연결된 초연결의 사회는, 반대로 생각하면 어딘가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유(浮游)하는 시대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리저리 떠다니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내러티브, 그리고 실재감은 콘텐츠의 가장 핵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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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국방일보 <병영에서 만나는 2022 트렌드>에 연재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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