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모르는 부모의 기쁨

by 심지훈

페이스북에 라온이 사진을 올린 건 초등학교 입학 이튿날인 지난 5일이었다. 제 엄마와 단둘이 영화관 데이트를 앞두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해맑게 웃는 모습이다. ‘1학년 심라온!’이라 적은 이 사진을 보고 우한용(소설가·서울대 명예교수) 선생님이 댓글을 남기셨다.


“일학년! 본인 잘 모르는 부모의 기쁨…. 그거 아는 데 지금 부모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한용 선생님의 언설(言說)은 현학적인 데가 있어서 맥락을 잘 살펴 읽어야 한다. 더군다나 페이스북 댓글 특성상 2~3줄에 의중이 들어있어 허투루 읽다간 엉뚱한 답을 달 수도 있다.


이번에는 이 ‘본인’이 헷갈렸다. 이 ‘본인’이 처음에는 ‘라온’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읽혔다. 다시 가만 보니 이 ‘본인’은 라온이를 이르는 게 아니라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인 것 같았다.


‘일학년! 심라온이는 잘 모르는 부모의 기쁨…. 그거 아는 데 지금 라온이 부모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처음에는 직관적으로 이리 읽었다. 그런데 사진 한 장을 두고 노교수의 언설이 이리 심오할 필요할 까닭이 있을까 싶어 퍼뜩 다시 읽혔다.


‘일학년! (심지훈) 자네도 모르는 부모의 기쁨…. 그거 아는 데 지금 자네 자당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네.’


나는 우 선생님의 두 줄을 후자로 읽어야 그 의중을 바로 파악하는 거라고 심증을 굳혔다. 인문학자는 특히 생각하는 힘이 강한 소설가의 말은 단순하지 않다. 되레 중층적이고 다층적이다. 왜냐하면 세상살이 법도는 한 가지만이 아니고 세인들이 한 가지라고 하는 법도에 의문을 가하고 거기에 가치를 세워 ‘신념의 탑’을 세우는 게 인문학자이기 때문이다. 또 뻔한 말도 창의적으로 달리하는 게 인문학자이기 때문이다.


‘본인’을 심라온이라고 읽든, 심지훈이라고 읽든 그 뜻의 무게는 작지 않다. 둘 다 인문학자의 남다른 사유(思惟)다.


노교수는 아니 노시인은 해맑게 웃고 있는 라온이에게 말한다.


‘심라온이는 잘 모르는 부모의 기쁨. 그거 아는 데 지금 라온이 아빠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아니다. 노교수는 아니 노시인은 어릴 적부터 커가는 모습을 익히 보아온 고 황계(黃溪) 심형준(沈亨準 1949~2013) 선생의 막내아들 지훈에게 말하고 있다.


‘지훈이도 모르는 부모의 기쁨. 그거 아는 데 지금 자네 자당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네.’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우와, 촌철이십니다! 그 세월만큼 잘 키우겠습니다!”


‘부모도 모르는 부모의 기쁨…’이라 대체 이 무슨 말인가. 나처럼 어린 자식을 키우는 부모말고 이미 자식을 다 키워 본 부모라면 능히 짐직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묘한 말은 이런 뜻이겠다.


예컨대 독서를 하면서, 글을 쓰면서 본인은 책을 읽을 줄 알고, 글을 쓸 줄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행위가 10년 가고 20년 가면 ‘과거엔 책을 읽을 줄 몰랐고, 글을 쓸 줄 몰랐다’고 깨닫게 된다. 읽기와 쓰기는 풍부한 자기 체험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허면 그전의 읽기와 쓰기는 뭔가. 그냥 글자 읽기고 기능적 쓰기에 불과하다. 읽기는 텍스트 읽기가 아니라 콘텍스트 읽기여야 진정한 읽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쓰기는 지어내기가 아니라 절로 쓰여져야 진정한 쓰기가 된다. 콘텍스트 읽기와 절로 써지는 바탕은 다방면의 체험이다. 남의 경험에 기대서는 맥락 읽기와 절로 써지는 일이 신통치 못하다.


‘부모도 모르는 부모의 기쁨’도 이런 맥락과 같다. 초등학교 1학년생을 둔 부모가 어디 완성된 부모이겠는가. 제아무리 똑똑한 척 해봐야 어리숙한 아마추어 부모일 뿐이다. 그 아마추어 부모가 느끼는 기쁨이란 때문에 자식 건사 다 시켜놓은 프로 부모가 보기에 상대적으로 미완이요 어설프다. 아마추어 부모가 나무만 보고 달뜬 양 기뻐하는 것이라면 프로 부모는 숲을 보고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온화한 미소’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 이 문제는 우한용 선생님만큼 그리고 내 어머니만큼 더 살아봐야 알 수 있겠지만 아마추어 부모라도 이 맥락까지는 짚어내야 좋겠다.


어쩌면 우한용 선생님은 내 댓글을 보고 당신의 두 줄을 역으로 다시 이해했을 수도 있다. 만약 선생님이 다시 이해한 것이 내가 다시 읽은 대로 라면 이 또한 이야기가 된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상상의 힘을 양껏 키우라고 생겨난 말이다. 그것도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통섭적으로 아우르는 인문학적 방식으로 말이다.


인간이 안다는 것, 본다는 것, 느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보통내기의 삶이란 자신이 무지한 걸 모른 채 무지한 채로 살다가는 게 전부다. 그러다 가로늦게 어렴풋이 뭔가 좀 알겠다 싶으면, 신(神)이 손짓한다. “이제 고만 온나. 욕봤다.”


아, 오해 마시라. 무지한 게 꼭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어설프게 깨인 것보다는 아예 무지한 것이 낫다. 이것저것 분별할 힘 없이 살아야 여든까지 아흔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어린 왕자처럼 살아야 장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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