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상담

by 심지훈

토요일 오전, 날씨가 좋아 아이들과 옥천 ‘천상의 정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서던 참이었다. 도로 건너 공원에는 붉은 천막을 줄지어 쳐놓고 학습지 행사가 한창이었다. 아이들은 그쪽에 관심을 보였다. 들렀다 가기로 하고 다시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웠다.


그리 졸지에 구몬학습 상담을 받게 됐다. 주차를 하고 행사장으로 갔을 땐 이미 테스트 중이었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많아 ‘광역시는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뒤에 파악한 일이지만, 기존 구몬 회원 아이들에게 자잘한 선물을 주기로 하고 나오게 해서 행사장이 풍성해 보였던 것이다.


라온이는 지난 여름 방학 시작 전 주말 빨간펜 학습지에서 책을 몇 권 받아온 일이 있었다. 제 엄마랑 이마트를 갔다가 개인정보와 맞바꿔 온 것이다. 월요일 아침 빨간펜 쪽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와 “간단한 체험 영상을 찍으면 책을 몇 권 더 주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리된 거 라온이와 한 번 다녀오라고 일러줬다. 라온이는 여름 방학을 시작하면서 <아빠와 방학 때 하고 싶은 일 10>을 A4 용지에 적어 책장 옆에 붙여두었다. 그 첫째가 ‘초밥먹기’였다. 라온이가 좋아하는 초밥집이 이마트 맞은편에 있다. 초밥을 먹고는 이마트 내 빨간펜에 가서 책을 받고, 둘째 미션인 ‘커피숍에서 음료 마시기’를 수행하기로 했다.


빨간펜 부스에 도착할 때만 해도 라온이는 ‘룰루랄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생애 첫 방학은 라온이에게 그만큼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그런데 빨간펜 부스에 앉자마자 라온이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이내 얼굴이 붉어지고 자칫 울음을 터트릴 지경에 이르렀다. 빨간펜 선생님이 느닷없이 ‘장마’를 묻고 ‘태풍’을 묻더니 국어교과서 두께의 책을 갖고 수업을 시작하는 것 아닌가?


라온이도 당황했지만 나도 당황했다. 라온이 표정을 살피니 곤란해서 어쩌지를 못했다.


“잠시만요. 이걸 몇 분이나 하는 건가요?”

“한 30~40분요.”

“네? 그럼 1시간 수업을 하는 거잖아요. 저희는 단순히 사진을 찍고 책을 받아가래서 왔고, 얘는 지금 방학을 시작했다고 너무 즐거워서 저기 옆 커피숍에 초코라떼를 사 먹으로 왔거든요. 미안한데 우리는 여기서 그만할게요. 책은 안 주셔도 돼요.”


이번에는 빨간펜 선생이 당황해했다. “죄송해요”를 노래하듯 했다.


“죄송할 건 없어요. 집사람과 제가 커뮤니케이션이 정확히 안 된 것이 첫째 문제니까요. 어쨌든 방학했다고 그리 즐거워하는 아이에게 지금 상황을 두고 보는 건 아닌 것 같네요.”


빨간펜 선생은 비닐봉투에 담긴 책을 건네면서 “이건 가져가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라온이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 시키고 “라온아, 당황했지? 아빠도 이런 자리인지는 몰랐어. ‘태풍’을 지금 모르면 어떠냐. 다음 주에 태풍이 온대. 그거 보고 태풍을 알면 되는 거야. 음료수나 먹자.” “응.”


우리는 더운 날 고생하는 빨간펜 선생들에게 시원한 음료를 두 잔 사다주면서 서로 미안해 말자고 했다. 선생들은 황송해했다.


7월말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라온이는 지난주 토요일 그와 비슷한 테스트를 분위기에 휩쓸려 이미 받고 있었다. 그 옆에서 바론이도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빨간펜 테스트는 수업 진도처럼 했다면, 구몬은 영역별 간이 테스트였다. 이번에는 라온이가 당황하지 않고 열심히 테스트에 응했다. 옆에서 보니 연산, 국어, 한자, 영어 순이었다.


연산은 척척했고, 국어는 생각보다 잘 못 풀었다. 한자는 나무 목(木), 날 일(日) 정도를 알았다. 영어는 boy, cake를 읽어줘야 그림에 맞는 번호에 동그라미를 쳤다. 예견된 일이었다.


연산은 제 엄마와 제법 선행을 해 쉽게 풀었다. 국어는 문제를 처음 접해봐 어리둥절하는 듯했다. 한자는 2학기 들어 방과후수업으로 배우기 시작했으니 그 정도만 아는 것이다. 영어는 어린이집 때부터 관심이 없는 데다, 엄마랑 한다 해도 연산만큼 흥미를 못 느끼는 터였다.


선생의 진단은 “라온이는 평균 수준인데, 설명을 해주면 곧잘 알아듣는다”며 구몬을 권했다. 바론이는 “수 감각이 아주 뛰어난 반면, 한글은 좀 늦다”며 형과 함께 구몬을 권했다.


라온이 바론이 상담사는 둘 다 아주머니들이었는데 입심이 대단했다. 웬만한 부모들은 신청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게 압도하는 언어를 구사했다. 아마도 아내와 아이들만 갔더라면, 아내 성품상 고사를 못하고 신청을 하고 왔겠다 싶었다.


상대를 설득하는 게 목적인 이를 만나면 듣기보다는 내 정보를 가급적 많이 발설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나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된 말을 넘어선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함으로써 약점을 내보인다.


라온이를 상담한 분은 내 장광설에 자기 할 말을 못해 조바심을 냈다. 으레 자기가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주도권을 잃어 입술을 달싹달싹 움찔움찔하는 거였다. 나는 내 말을 충분히 한 뒤 상담자의 말을 들었다. 충분히 듣고 물었다.


“초등학교 과정은 1, 3, 5학년이 중요하다면서요. 3, 5학년은 과목 수가 팍팍 늘어나는 때라고. 그런데 학습지에서 하는 말과 학교의 교육 사이는 커다란 갭이 있다고 느껴져요. 학교 교육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건데, 실제로 그런가요?”

“(계단을 그려 사선으로 그으며) 아버님 말씀대로 1, 3, 5학년 사이에는 이만큼의 갭이 생겨요. 이걸 학습지가 메워주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도 라온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다른 애들 시키는 걸 보고 걱정이 없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라온이가 1학년이 된 뒤 조치해도 늦지 않는다고 판단했지요. 그렇게 1학년이 돼 보니, 초등 1학년 과정이라는 것이 제 어릴 때랑 똑같더라구요. 라온이는 어린이집 때부터 선생님 이야기를 귀담아 잘 듣고 잘 따라했어요. 지금도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잘 따라해요. 그러니까 별도의 학원이나 학습지 도움 없이 제 엄마의 도움만으로도 잘 따라 해요. 저는 라온이가 3학년이 돼 봐야 또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고 봐요. 요즘 애들은 5살 만 돼도 수영, 태권도, 발레, 영어, 수학, 국어 기본 3~5개 학원을 다녀요. 그런데 좀 지나 보면 금방 학원을 끊었다는 경우도 많아요. 시작했다면 최소 3년은 해봐야 자질을 알 것인데, 때문에 저는 시작보다는 지속할 수 있는 타이밍이 훨씬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는 결국 구몬을 신청하지 않았다. 엄마와 라온이 바론이가 잘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이 행사장에서 우리는 우리 동 구몬 회원들을 속속 알게 됐다. 누구도 하고, 누구도 한다는 개인정보 발설이야말로 엄마들 불안심리를 자극하기에는 그중 좋은 약이었을 것이다.

행사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라온이 테스트지를 어깨너머로 본 걸 토대로)


‘국어 문제집은 1학년 겨울방학 때 내가 함께 해주어야지.’

‘영어는 제 엄마 말대로 때를 보고 과외를 붙이면 좋겠어.’

‘바론이는 6살까지는 좀 더 성향을 지켜보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옥천행 대신 아내 회사 근처 돈가스집에서 점심을 먹고 건너 선사유적지 동네 축제를 구경했다. 대지는 초록이 짙고 하늘은 파랬다. 바람은 맛나게 시원했다.


사람은 무릇 시간과 공간을 잘 느끼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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