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8쪽짜리 원고를 가져와 한번 봐달라고 했다. 아내의 글은 좋았다. 손댈 것이 거의 없었다. 중언부언하는 대목과 불필요한 대목 그리고 도치하면 좋을 대목 등 몇 군데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러면서 “당신이 납득이 되면 고치시라”고 덧붙였다.
아내 글을 보면서 글재주가 아깝다 여겼다. 공직생활로 굳어진 공직언어에 갇혀 있는 게 일단 안타까웠다. 나는 “아주 잘 썼지만 재미는 참 없다”고 했다. 되레 자유롭게 쓴 마지막 3쪽은 선명성이 두드러져 수작이라 할 만했다. 글에서 좋은 기(氣)가 느껴졌다.
남의 글을 수정하는 일은 늘 조심스러운 일이다. 이 조심스러움은 경험칙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좋은 글 선생을 4명 알고, 나쁜 글 선생을 1명 안다. 경험으로 안다.
좋은 글 선생과 나쁜 글 선생을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다. 글쓴이의 수준과 입장을 고려해 글쓴이 고유의 톤(=기운)을 잘 살려 지도하고 고치면 그이는 좋은 글 선생이다. 반면 글쓴이 고유의 톤을 죽여가며 자기 마음대로 고쳐 쓰면 그이는 나쁜 글 선생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글에 관한한 인간은 저마다 타고난 기질이 있고 그 기질이 표현이란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손본다는 것은 글쓴이의 기질을 잘 살려 손본다는 것이 된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샘’을 엄마 뱃속부터 갖고 난다. 이 샘을 누군가는 전혀 가꾸지 않고, 가꾸지 못해 메말라 있을 뿐 뒤늦게라도 샘을 살살 파들어가면 어느 순간 샘물이 스멀스멀 배듯 글물도 그리 배어 나온다. 그 채로 샘을 조금 더 파면 샘물이 마술처럼 샘을 찰랑찰랑하게 메우듯 글물도 그리 둥글둥글 차오른다. 그리 어느 날은 이 글샘으로 글비가 느닷없이 쏟아지기도 한다.
메마른 글샘에서 나온 글이라 하더라도 글에는 고유의 톤이라는 게 있다. 그 톤을 살려 고친다는 것은 글쓴이의 기를 북돋운다는 뜻이다. 남의 기를 꺾어 아무리 잘 다듬어봐야 결국 소탐대실이다. 글쓴이의 기를 죽이면 글도 죽는다. 죽은 글을 갖고 용을 써봐야 허접한 글밖에 안 된다.
“기를 살려 글을 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자신과의 글 겨루기를 자신한다는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상대와의 글 겨루기를 자신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 없는 사람은 자기가 써놓고도 잘 썼는지 못 썼는지 구분하지 못한다. 해서 교정을 보는 사람이 시원찮아도 의지하게 된다.
자기 글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형식적이고 수순에 불과한 교정과정을 우습게 여긴다. 상대가 고친 글에 납득이 안 되면 성질을 낸다. 글을 잘 고치는 사람은 남의 글에 붉은 펜을 찍찍 긋지 않는다. 토씨를 한둘 손볼 뿐이다.
나는 ‘아’와 ‘어’의 토씨를 한둘 바꿈으로써 ‘우와!’하고 탄성을 자아내도록 한 교정자를 만난 일이 있다. 그야말로 내가 만난 좋은 글 선생 4명 중 으뜸이었다.
5년 전 인정과 도리에 이끌려 모 금융기관 회장의 칼럼 10편을 대신 써주면서 만난 서울의 모 경제신문 데스크였다.
그는 토씨 하나 혹은 둘을 바꿈으로써 회장의 칼럼을 한 단계 격상시켜 놓았다. 10회를 썼으니 나는 일면식도 없던 이 데스크와 10번의 겨루기를 해야 했다. 내 기억으로는 4번 정도를 원문 그대로를 싣고, 5번은 토씨 한둘을, 1번은 문장을 손댔다. 나는 그의 교정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친 그의 글이 나보다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겪은 최악의 글 선생은 한국일보 대구본부의 데스크 전준호 씨였다. 이 양반은 아상(我相)이 꽉 낀 양반이었다. 나는 한국일보 7년 근무하면서 기사를 쓸 의무는 없는 사람이었다. 채용조건이 ‘스토리텔링만 한다’였다.
그런데 1년에 한두 번 정도 기사를 써줘야 했다. 대구본부장이었던 유명상 씨의 부탁 때문이었다. 광고성 특집기사, 상품 홍보기사는 자체 인력으로 처리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들이 돌고 돌다 종내 내게 떨어졌다.
내가 가장 황당했던 것은 기사 2건이다. 하나는 새마을세계화재단 이사장 전면 인터뷰였고, 다른 하나는 무슨 놈에 버섯 대표 확대 동정기사였다.
유명상 씨는 내가 새마을운동 석사논문을 쓴 것을 알고 이 광고성 기사를 부탁했다. 그런데 막상 만난 재단의 이사장이란 사람이 새마을운동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낙하산 인사였다. 어려운 인터뷰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재단의 부장이란 사람들도 다들 기초자치단체장을 노리는 정치꾼들이었다. 김관용 전 경북지사의 행태가 이랬다.
그런데 한국일보 본지에 이 인터뷰 기사가 난 이튿날 아침,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대구 데스크가 기사를 제 마음대로 이리 뗐다가 저리 붙였다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만약 대구 데스크가 전직 외교관 출신의 재단 이사장을 만나봤다면 이 글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뗐가다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정말 쪽팔렸던 것은 새마을운동은 이런 것이라고 부연해 놓은 것을 이사장이 한 말인 양 쿼터처리 해놓은 거였다. 이사장은 자기 일에 자신이 없었던 만큼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나는 “미친 놈”이었을 거다. 동시에 한국일보를 욕했을 거다.
전면인터뷰를 내고도 감사전화 한통 못 받긴 생전 처음이었다.
두 번째는 ‘무늬만 기자’ 하나가 3,000만원짜리 광고기사로 잎새버섯 대표를 물어왔다. 대구에서 돌고 돌다 해결이 안 되자 유명상 씨가 또 부탁을 해왔다. 잎새버섯의 효과를 검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식약청부터 충청도 연구기관의 문의결과를 취합하고 잎새버섯 대표의 입장의 진위를 검증하기까지 꼬박 3일이 걸렸다. 그러고도 기사를 논리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 기사를 손댈 놈은 하늘 아래에는 없다고 봤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한국일보 본사 사회부 데스크가 전화가 왔다. 그는 나를 상식 없는 놈이란 식으로 말했다. 가만 듣자 하니 문제의 대구 데스크가 또 기사에 손을 댔고, 그 기사를 본 본사 데스크는 내 원문대로 써야 옳은 게 아니냐며 나를 책망했다.
나는 하도 기가 막혀 이리 대꾸했다. “이보세요. 대구에서 내가 기사를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시간 빼서 기사를 써줬으면 고마워 할 일이지 내게 책임 운운할 건 못 되지요.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건 내 원문과 같은 겁니다. 그건 대구 데스크한테 물어보세요. 왜 그렇게 바꿨는지.”
그랬더니 발끈한 본사 데스크가 이리 말했다. “아니 자기 기사에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겁니까?”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게 아니라 나도 부탁을 받고 썼고, 그 기사를 마음대로 고친 건 대구 데스크니까 대구 데스크한테 물어보라는 말입니다. 그게 책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부 데스크끼리도 소통이 안되는데.”
당시 대구 데스크와 본사 데스크는 입사동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성질이 났다. 대구 사정도 모르면서 저들끼리 데스크입네 하고 남의 귀한 시간 뺏고, 남의 글 제 모자란 상식으로 고쳐서 번번히 사람 쪽팔리게 만들고. 나는 그런 게 싫었던 거다.
대구 데스크는 내가 보기에 기관 자료 받아쓰는 받아쓰기 스트레이트 정도나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본사 출신이라는 허울이 그의 실력을 감춰주고 있었다.
기획이 안 되는 기자가 연차만 차서 데스크가 되면 겨우 경험으로 키운 받아쓰기 스트레이트 쓰는 실력만 갖고 후배들을 조리돌림한다.
때문에 후배가 실력이 있어도 자기 실력이 없어서 습관대로 멀쩡한 글을 개발새발로 만든다. 나는 처음에는 ‘엿 먹으라’는 건가 오해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글 실력이 없는 채로 데스크에 앉아서 발생하는 명명백백한 사고였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사고로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게 대구 한국일보의 수준이었다. 내 손에 오물 묻히는 건 먹고살겠다고 한 일이라 쳐도 노력 않고 반성 않는 건 정말이지 봐주기가 힘들었다.
헌데 노력도, 반성도 어느 정도의 깜냥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나쁜 글 선생과는 겨뤄서는 이길 수 없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하는 그 심정을 대구 데스크 같은 나쁜 글 선생을 만나보면 능히 알게 된다.
참고로 한국일보 승명호 회장도 2015년 대구에 와 “대구에는 심지훈 씨가 있다”고 했다. 하물며 대구 데스크가? 가당찮아 위 기사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