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의 여름방학 계획표

by 심지훈

계절이 오고감은 피부가 가장 잘 느낀다. 닷새 전부터 밤새 켜놓던 에어컨이 부담스러워졌다. 나는 추워서 이불을 돌돌 말아 잤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자다가 깨서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했다. 그제와 어제는 아이들이 잠들자 슬그머니 에어컨을 껐다. 그 채로 아이들은 새근새근 잘 잤다. 계절의 추가 성큼 가을 곁으로 가 있음을 느낀다.

라온이가 여름방학에 들자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올핸 방학이 없는 어린이집에서 바닥 리모델링 공사로 일주일간 방학을 주었다. 그리 라온이와 바론이를 한꺼번에 떠안았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일주일간 아이들에게 ‘무한 자유’를 주었다. 그게 당장 아이들이 살고 내가 사는 길이라 싶었다.

무한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아이들은 TV 앞에 나란히 앉았다. 의좋게 보기도 하고, 서로 보고 싶은 걸 보겠다고 우기기도 싸우기도 했다. 대체로 덕이 있는 형 라온이가 양보를 했다. TV가 지겨워지면 노트북으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을 보여줬다. 그러면 그걸 갖고 또 한참을 봤다. 아주 지겹게 볼 만큼 봤다 싶으면 한 번씩 놀이를 하라고 미디어를 껐다. 그러면 또 둘이서 거실에 앉아 장난감 놀이를 한참했다.

지난 6월 요행히 아이들은 패드 끊기에, 아빠는 술 끊기에 성공했다. 몇 번의 신호를 준 끝에 ‘패드 압수’를 단행했다. 만 7세 라온이는 조절이 되는데, 만 4세 바론이는 조절이 안 됐다. 명목은 “우리 한 달 동안 패드 사용 안 하기를 해 보자”였다. 내심 아빠 마음은 이참에 패드를 끊는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중간중간 “한 달이 언제 되냐”고 물었지만, 한 달이 훌 넘자 패드에 대한 관심을 껐다.

일주일 무한 자유 시간 막바지에 패드를 내주었다. 바론이가 다시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날 패드를 다시 수거했다.

라온이의 여름방학은 그제야 시작됐다. 1학년 때처럼 <라온이의 여름방학 계획표>를 짜라고 했다. 컴퓨터를 켜고 한글문서를 열어 8가지를 작성했다.

1.아빠와 둘이 워터파크 가기
2.꿈에 급식 먹기
3.흔한남매 시리즈 사기
4.그리스로마 신화 시리즈 사기
5.백앤아 시리즈 사기
6.도서관 가기
7.바론이 공부 가르쳐 주기
8.아빠와 요리하기

1학년 여름방학에 비해 단출해졌다. 가지수도 10개를 채우지 못했고, 활동도 먹거리에서 읽기로 돌아섰다. <흔한남매> <백앤아> <그리스로마신화>는 모두 만화책이다. <꿈에 급식>은 나도 정확히 모르지만 출처가 유튜브인 것 같다.

라온이에게 워터파크와 냇물과 계곡 중 어느 게 가장 좋은지 물었다. 워터파크, 냇물, 계곡 순으로 꼽았다. 점수를 매겨보라고 했다. 98, 94, 84점을 각각 주었다. 워터파크는 유수풀이 좋고, 냇물에선 고기잡기와 스노쿨링이 좋다고 했다. 계곡에선 시원한 물줄기가 좋다고 했다.

라온이가 작성한 계획 말고, 진짜 실천 계획은 따로 있다. 방과후 미술과 바둑 그리고 태권도다.

라온이는 태권도를 오전에 1번, 오후에 1번 2번씩 간다. 오전에는 줄넘기 특강을 하고, 오후에는 평소처럼 운동을 2시간씩 한다.(하루에 운동을 2시간 하는 아이는 라온이가 유일하다.)

라온이는 학교에 가 월요일에 미술, 목요일에 바둑을 한다. 그리고 태권도장으로 가 줄넘기를 1시간 한다. 낮 12시에 땀범벅이 돼 돌아온다. 그러면 욕실로 달려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건 최근 계곡에서 시원한 물줄기로 익힌 기술이다. 옛날 생각이 나서 등목을 알려줬다. 지하수처럼 시원하지는 않지만 라온이도 등목을 좋아한다.

“아, 시~원하다!”

무한 자유 시간을 가진 라온이에게 방학 동안 읽을 책을 직접 고르게 했다. 1학년 겨울방학 때 읽은 옛이야기 전집을 다시 골랐다. 읽지 못한 나머지를 읽겠다고 했다.(대견한 아이다!)

그새 읽기 실력이 많이 늘었다. 글밥이 제법 많은 새로운 이야기를 척척 읽어낸 뒤, 무슨 이야기인지 깜냥껏 들려주었다.

엄마랑 하는 연산, 디딤돌수학도 미루지 않고 낮시간에 척척 한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엄마가 채점을 해서 틀린 건 바룬다.

쉴 때는 요즘 재미를 들인 딱지치기를 한다. 며칠 전 갑자기 딱지를 접기 시작하더니 스무 개도 넘게 딱지를 만들었다. 아빠에게 딱지치기 대결을 신청했다. 처음에는 딱지 넘기기는커녕 맞추기도 잘못했는데, 3일 만에 아빠와 실력이 비등해졌다.

독서는 주로 아침시간에 한다. 전날 자기 전 읽을 책을 고르고, 아침에 또랑또랑하게 낭독한다. ‘낭독은 전 두뇌운동이다.’ 그 영상을 보여주고 묵독하지 말고 음독을 할 이유를 알려줬다.

자기 전엔 요즘 라온이 바론이가 푹 빠진 ‘나라백과’와 ‘인물백과’ 중 1~2개를 읽는다. 이때는 아빠가 읽어준다. 챕터마다 퀴즈가 있어 라온이와 바론이가 좋아한다. 아빠는 책을 읽다가 부연설명을 해 준다.

어제 라온이는 세종대왕를 꼽았다. 세종대왕 편을 읽으면서 조선시대 왕이 모두 몇 명인지, 장자상속, 장자우선이 뭔지, 왜 조선의 왕이 장자우선인데도 둘째아들이 왕이 된 경우가 더 많았는지, 왜 큰아들은 일찍 죽었는지, 조혼이 뭔지를 들려줬다.(조혼에서 더 들어가면 대몽항행기에서 유래한 ‘화냥년(화향년)’이 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조선시대 왕은 모두 몇 명이었을까요?”
“10명?”
“3명?”
“땡! 모두 27명이었습니다.”
“자, 그럼 조선의 왕은 누가 됐을까요? 라온이 같은 첫째아들일까요? 바론이 같은 둘째아들일까요?”
“첫째요!”
“둘째요!”
“라온 바론 모두 정답! 조선시대 때는 장자우선제도가 있었어요. 장자는 라온이 같은 큰아들, 맏아들을 뜻하는 거예요. 그런데 조선의 왕 27명 중에는 장자보다 바론이 같은 차자가 더 많았아요. 장자우선제도를 기본으로 했는데도 큰아들이 왕이 된 건 모두 7명(*)뿐이었어요. 그에 반해 둘째아들이 왕이 된 경우는 12명이나 됐지요. 나머지는 왕의 손자나 손자의 손자인 고손자가 왕이 됐어요.”
*7명: 문종(5대), 단종(6대), 연산군(10대), 인종(12대), 현종(18대), 숙종(19대), 경종(20대)

“자, 여기서 또 문제 나갑니다. 그럼 왜 큰아들이 왕이 되는 경우가 적었을까요? 1번 큰아들이 게을러서, 2번 아빠 임금이 큰아들을 싫어해서, 3번 큰아들이 일찍 죽어서, 4번 큰아들이 까불어서”
“3번!”
“라온 정답! 큰아들이 일찍 죽거나 몸이 허약해서 왕이 못된 거예요.”

“그럼 또 문제 나갑니다. 큰아들은 왜 일찍 죽었을까요? 1번 방귀를 많이 껴서, 2번 까불다가 크게 다쳐서, 3번 너무 착해서, 4번 엄마가 너무 일찍 아이를 낳아서”
“4번!”
“오, 라온 정답! 조선시대에는 남자는 15세, 여자는 13세면 결혼을 할 수 있었어요. 그걸 이를 조, 결혼 혼 조혼(早婚)이라고 해요. 아주 일찍 결혼한다는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15세면 라온이가 중학교 2학년인데 아직 애죠. 그래서 옛날에는 꼬마신랑이라고 했어요. 꼬마가 신랑이 되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신부가 신랑보다 3~5살 정도 나이가 조금 더 많았어요. 그래야 꼬마신랑을 돌볼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꼬마신랑을 돌본 부인도 사실 아직 아이거든요. 결국 아이가 낳은 아이는 자연 몸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맏아들은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어요.”

라온이가 실컷 듣다 묻는다.

“근데 세종대왕을 읽다가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맥락 없는 얘기라는 장자의 질타다.(어이쿠야!)

“오, 좋은 질문. 조선의 왕 이야기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한 거야. 라온아 근데 이런 이야기는 아빠라고 아무나 들려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어때, 재미는 있지?”
“응.”
“그럼 됐어.”

올여름엔 영어 공부도 시작했다. 영어책을 읽어줄까, 영어단어를 공부할까 하다 게임처럼 할 수 있는 단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인 때문인지 생각보다 단어를 많이 알고 있었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그림영어사전의 330단어를 2~3회독 한다. 330단어라고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단어도 있어 실제는 250단어 내외일 것이다. 아는 단어는 패스, 영 모르는 단어는 노트에 옮겨 적는다.

라온이에게 아빠와 똑같은 두툼한 단어장을 선물했다. 아빠의 단어장을 보여주며 결국 공부는 메모장으로 승부가 난다고 알려줬다. 옮겨 적은 단어는 퇴근 후 엄마와 다시 한번 합을 맞춘다. 엄마에게 문제를 내기도 하고, 바론이에게 문제를 내기도 하면서 각인시킨다. 어떤 단어는 언어감각이 특출난 바론이가 더 잘 알았다.

예컨대 eggplant(가지)는 라온이 머릿속에 여간해선 잘 스며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론이는 “가지”라고 묻자 “에그플랜트!”라고 즉답했다. 다섯 살 때 배웠다며 우쭐했다.

초등 수준에서는 단어 330개만 친숙해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단어들이 문장의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고, 정확히 쓸 줄 아는 건 중등 수준일 것이다.

이번에 라온이와 영어놀이를 시작하면서 알았다. 이미 라온이는 자기 논리체계가 갖춰지기 시작해 눈으로 이미지를 찍는 단계는 좀 지났다는 걸.

라온이보다 학습능력이 6개월 이상 빠르고, 언어감각이 뛰어난 바론이는 어쩌면 7세에 영어를 시작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라온이를 보며 했다.(2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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