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가마솥 밑이 노구솥 밑을 검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마솥은 철제고 노구솥은 놋이나 구리로 만든 솥을 말합니다. 철로 만든 솥은 금세 검어지지요. 반면 놋이나 구리 솥은 잘 검어지지 않습니다.
비슷한 말로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지요.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속담도 있습니다.
이 속담들을 한데 엮으면 ‘격 떨어지는 비슷한 치들끼리 앉아 남에 흉을 본다’는 뜻이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할 때, 그 말을 하는 자가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일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아니 도긴개긴이라 그리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실은 인간은 저마다의 우물을 짓고 삽니다.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의 한계를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 옛날 누군가가 ‘우물 안’의 ‘개구리’를 보고 ‘좁장한 세계관을 지닌 놈’이라고 포착했을 때,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또 다른 우물 안 개구리의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는 꿰뚫지 못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겨우 경험 기능 지식의 범위를 갖고 ‘우물 안 개구리’를 탄생시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우물 안 개구리’는 숫제 경험이 적은 자, 지식이 미천한 자, 기능이 모자란 자를 일러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믿는 자들이 우쭐대며 쏘아붙이거나 싼 안주처럼 내뱉는 저급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뱉는 (명백히 우위에 있다 할 지라도) 자 역시 우주의 모든 것에 능통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가당착이요, 자승자박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물 안 개구리’가 누대로 흘러 통용되는 까닭은 분명 있습니다.
그건 다음 아닌 위에서 언급한 “저마다의 우물” 때문입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저마다의 우물을 짓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 비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상대 비교가 가능하다는 말은 어떤 사안에 관한한 자기 우물이 비교적 더 넉넉하다면 상대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공격할 수단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인간의 보편적 소행 중 하나입니다.
저마다의 우물은 결국 저마다의 색깔, 특색을 갖습니다.
고유의 색깔과 특색은 그 우물을 빛나게 합니다. 그 우물은 넘보기 힘든 신성성을 갖습니다. 본질적으로 같은 ‘우물 안 개구리’이면서 과하게 대우는 받는 우물과 개구리가 있습니다.
바로 교수 의사 과학자 같은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개구리들입니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우물을 가진 개구리들은 이 전문가 개구리와 그의 우물을 우대합니다.
그 우대 분위기 때문에 전문가 개구리의 그 우물은 빛이 납니다. 그 빛을 등에 업고 “권(權)의 기(氣)”를 마구마구 쏘아댑니다. 그게 바로 권위입니다.
이 전문가 개구리엔 작가 미술가 도예가 음악가 영화배우 가수(아이돌) 같은 예술가도 있습니다.
이 개구리와 이 개구리의 우물 역시 아우라가 만만치 않습니다. 어느 궤도에 오르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교수 의사 과학자 작가 미술가 도예가 음악가 영화배우 아이돌도 알고 보면 하잘것없는 개구리에 불과합니다.
전문가는 달리 말하면 “외곬”이거나 “젬병”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트인 이를 일러 외곬이라고 하고, 어느 쪽은 완전 먹통인 이를 일러 젬병이라고 합니다.
전문가의 속성은 대게 외곬이거나 젬병입니다.
평범한 개구리는 전문가 개구리의 이면인 외곬과 젬병을 보지 못합니다.
전문가 개구리의 맹점은 경험입니다. 한정된 경험이 깊을 뿐 다양한 경험은 하지 못해서 우물 안 개구리인 게 전문가 개구리입니다.
내가 아는 평범한 개구리 중엔 중학교만 겨우 나와 전통시장에서 배추를 떼 팔아 모은 돈으로 시장통에 자그마한 통닭집을 열어 또 돈을 모아 번듯한 횟집을 열어 직원이 200명이나 되는 대형횟집을 5개나 가진 이가 있습니다.
이 개구리의 특징은 바닥 경험이 빠삭하다는 것입니다. 이 경험은 모르긴 해도 아인슈타인도 감흥을 일으킬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지식이 떨어진다 뿐, 이 개구리는 경험과 동시에 월등한 기능을 지녔습니다.
이처럼 어떤 개구리든 저마다의 우물을 짓고 그 안에 살아갑니다.
저만 하더라도 어마무시한 우물을 짓고 살아갑니다. [글밥] 작가 심보통의 서재는 철옹성처럼 돼 있습니다. 필요한 책, 앞으로 볼 책들이 빼곡히 자리해 있습니다. 잘 모르는 이가 보면 무슨 고물상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내 우물은 철옹성입니다. 딴딴하게 한 땀 한 땀 흘려 20년에 걸쳐 지었습니다. 서재에 책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갖은 기물(氣物)이 오와 열을 갖춰 있고, 작가 살림살이가 그 틈새를 메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은 까닭은 저 스스로 ‘나는 우물 안 개구리’를 천명하는 것인 동시에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우물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때문에 저는 평범한 개구리나 전문가 개구리를 부러워하지도 타박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 우물을 가꾸는데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느 날 내 우물에 과도한 사랑이 쏠린다면, 내 우물을 반짝반짝 잘 관리한 덕분이라 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물은 우물이고 개구리는 개구리일 뿐임을 알기에 나는 내 스케줄을 소화할 것입니다.
덧붙여 이런 우물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차세대 지도자로 거명되는 이준석의 반짝이는 우물은 ‘구라쟁이 우물’입니다. 구라를 잘 쳐 빛이 나는 우물입니다. 20대에 무시로 성상납을 받은 신인 정치인이 그 문제에 대해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한 걸 보면, 그의 싹수는 이미 노랗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재명이 위험할까요, 이준석이 위험할까요. 저는 이준석이 훨씬 더 위험한 놈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왜? 20대에는 20대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준석에게는 그런 정서가 없습니다.
지난주 구속된 조국의 반짝이는 우물은 ‘자뻑 우물’입니다. 조국은 천지 분간을 못해도 저리도 못할 수 있나 싶은 얼빠진 개구리입니다. 교육열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한민국에서 자그마치 ‘입시비리’로 구속된 자가 독립운동가마냥 설쳐대고 있습니다. 구속된 지 하루 만에 옥중서신을 통해 정치놀음에 나섰습니다. 이 개구리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는 걸까요. 어떤 인생을 살아야만 이런 ‘꼴통 캐릭터’가 구축될까요.
최근 국민의힘 당대표에서 날아간 한동훈의 반짝이는 우물은 ‘우롱 우물’입니다. 그는 검사 시절엔 ‘서초동 편집국장’이라 불렸습니다. 기사 소스를 자기가 마음에 드는 기자에게 하나씩 떡 나눠주듯 했다는 겁니다. 기자들의 이상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그는 그가 할리우드 주연배우인 줄 알았을 겁니다. 법무부장관 시절 땐 어땠습니까. 만날 대중과 사진찍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법무부장관을 본 적 있습니까. 당대표 시절엔 진짜 주연배우처럼 행동했습니다. 그의 언행은 늘 계획적이고 각본에 짜져 있었습니다. 주연이면 연기를 주연처럼 잘했어야 합니다. 조연들보다 연기를 못했습니다. 마치 빵빵한 스폰서 덕에 억지로 꿰찬, 연기가 엉망인 3류 딴따라를 보는 듯했습니다.
이재명의 반짝이는 우물은… 하도 역겨운 구정물이라 입에 담기도 싫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각자 한 우물을 가꾸어야 한다면 적어도 ‘구라’ ‘자뻑’ ‘우롱’ 같은 걸로는 치장하면 안 됩니다. 이런 우물을 가꿀 바에야 그냥 ‘소시민’ 개구리로 사는 게 백번 낫습니다.
개성 있는 우물은 겸양, 소박, 진지, 관조 같은 걸로 구축해야 딴딴하게 서는 겁니다. 그런 우물에 살아야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보다 상수도 있습니다. 도가에는 드넓은 세상구경을 ‘주유팔로(周遊八路)’ 넉 자로 표현합니다. 세상 구경을 충분히 한 개구리는 그저 우물에 살 뿐입니다. 한동훈의 가발, 한동훈의 키높이구두, 한동훈의 명품양복 같은 겉껍데기가 대저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소납(笑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