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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체팔루에서 만난 시네마 천국

시칠리아 여행기 07 : 시칠리아 체팔루

by 이지

체팔루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배경지다. 마을 곳곳에는 영화 속 장면을 담은 사진과 기념품이 가득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이곳이 특별한 장소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 마을을 걷기 전, 나는 저녁 식사와 함께 와인을 곁들이며 시네마 천국을 보기로 했다. 영화를 먼저 보고 마을을 걷는 것이, 그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영화는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는 소년 '토토’의 성장기이다. 전쟁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토토. 그에게 집 근처 극장 ‘시네마 천국'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자 위로였다. 저녁이면 마을 사라들이 모여들고, 토토는 영상 기사 '알프레도'를 따라다니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다. 둘은 나이를 초월한 깊은 우정을 쌓아간다.


시칠리아 체팔루, 해변

그러던 어느 날, 필름에 불이 붙고 극장이 화재로 무너진다. 알프레도 구하려 뛰어든 토토는 그의 목숨을 구하지만, 알프레도는 시력을 잃는다. 극장은 폐허가 되고, 마을엔 무료한 시간이 흐르게 된다. 그러던 중 한 마을 주민이 복권에 당첨되어 극장을 다시 세운다. 그러나 상영기사를 구하지 못해 문을 열지 못하던 극장은, 결국 어린 토토를 상영기사로 채용한다. 알프레도 곁에서 기술을 익힌 토토는 '시네마 천국'의 최연소 상영기사가 된다.


시칠리아 체팔루의 방파제, 이곳에서 토토와 엘레나가 재회한다.

고등학생이 된 토토는 여전히 상영기사로 일을 하며 학교에 다닌다. 어느 날, 금발머리의 전학생 '엘레나'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진심 어린 구애 끝에 둘은 사랑을 시작하지만, 신문의 차이 앞에 둘의 사랑은 시련을 맞는다. 결국 엘레나는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도시로 떠나 버리고, 토토는 남겨진 이별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낸다.


무더운 여름, 극장은 방파제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를 상영한다. 별빛 아래 바닷바람을 맞으며 영화를 보는 체팔루의 여름밤은 마치 꿈처럼 펼쳐진다. 그러던 어느 날, 장대비가 쏟아지고 모두가 자리를 떠난 방파제에 토토는 홀로 누워 빗속을 견딘다. 이별의 아픔을 여름 내내 묵묵히 견뎌낸 토토.

"이 여름이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그렇게 속삭이는 순간, 엘레나가 불쑥 나타난다.

"갑자기 떠나 미안해."

두 사람은 재회의 키스를 나눈다. 이때 배경으로 흐르는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 그리고 체팔루의 해변. 바로 이곳에서 그 장면이 촬영되었다.


시칠리아 체팔루, 해변

다음날 아침, 나는 체팔루의 구시가지를 천천히 걸었다. 1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대성당을 지나 해변을 걷다 우연히 아치형 통로 아래로 파란 바다가 펼쳐진 길을 발견했다. 그 길을 따라가자 영화 속 방파제가 눈앞에 나타났다. 30년 전 그 장면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체팔루는 토토와 엘레나의 사랑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방파제 위에서 무언가를 촬영 중인 젊은 남녀 몇 명이 있었고, 노부부는 의자에 앉아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토토의 그리움과 그 여름의 시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꽤나 힘든 일이다. 어떤 이별은 쉽게 잊히고, 어떤 이별은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야.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른 사람 만나면 잊게 될 거야.' 누군가 그렇게 말해도, 정작 그 시간엔 아무 위로도 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된다. 그때의 고통도 언젠가 '별일 아니었구나'라고 말하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을 말이다.


삶은 이별과 상실을 반복하며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젊은 우리는 그런 모든 과정이 낯설고 힘겹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구도 내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기.'

그것은 나를 해치고, 타인까지 무너뜨리는 길이다. 술에 기대지 않고,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이 시간이 지나면 어떤 아픔이든 무뎌진다는 것을 말이다. 힘들고 괴로운 일을 겪으며 견뎌냈던 그 시간들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어떤 시련과 이별이 들이닥쳐 나 자신을 벼랑 끝으로 이끌지라도 견뎌야 한다. 모든 것들은 자연히 지나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은 무뎌진다. 그 견딘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느 날, 엘레나가 불쑥 나타났듯, 내 삶에도 그런 여름의 끝자락이 찾아올 것이다. 더 나은 내가 되어, 더 깊은 사랑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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