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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감을 느끼는 순간

시칠리아 여행기 9 : 아그리젠토

by 이지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골목

아그리젠토는 시칠리아 남쪽 중앙에 위치한 도시이다. 아프리카와 마주 보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해양도시로 발전한 항구 도시이다. 과거 그리스의 지배를 받아 지금도 그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도시 앞 넓은 평야에는 그 시절 세워진 수많은 신전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체팔루에서 출발한 기차는 시칠리아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향했다. 2시간쯤 지났을까, 기차는 아그리젠토 중앙역에 도착했다. 작은 기차역을 빠져나오자 도시 아래로 펼쳐진 평원과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슴이 확 트이는 풍경이었다. 평원 너머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그 바다를 등지고 가파른 언덕 위에 형성된 도시의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기차역을 뒤로하고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넓은 광장에는 관공서와 관광 안내소가 자리해 있었다.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골목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으레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이 관광 안내소다.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한 후 지도를 받아 나왔다. 전날 예약한 숙소는 알고 보니 아그리젠토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었다. 지형을 잘 몰랐던 탓에, 가파른 언덕길 위에 위치한 숙소를 예약하게 된 것이다.


20kg에 달하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비탈길을 올라 도착한 숙소는 기대와 달리 다소 실망스러웠다. 저렴한 가격에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구조라망설임 없이 예약했지만, 내부는 낡았고 난방도 잘 되지 않아 방 안이 쌀쌀했다. 그래도 하루 정도 머물기엔 괜찮겠지, 스스로 위로하며 짐을 풀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관광 안내소에서 챙긴 지도를 들고 숙소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거리엔 노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건물 외벽과 길바닥까지 노란빛으로 물들어, 어린 시적 보았던 만화영화 '슛돌이'가 떠올랐다. 시칠리아로 축구 유학을 간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였다. 그 배경과 닮은 작은 골목길과 언덕길, 그리고 노란 건물들은 아그리젠토의 풍경과 겹쳐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골목

길을 걷다 보니 작은 성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도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단순히 ‘관광지’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성당의 옆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바깥의 바람 소리, 개 짖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모두 사라졌다. 마치 진공 상태에 들어선 듯, 내딛는 발소리만 조용히 울릴 뿐이었다. 안쪽은 촛불의 일렁이는 불빛으로 가득했고,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웅장하고 고요했다.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성당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유럽의 성당들은 대부분 아름담지만, 많이 보다 보면 서로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안 들어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 성당은 달랐다. 우연히 들른 이곳은 평소의 성당들과는 다른 감정을 안겨주었다. 아그리젠토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 마주한 고요한 이 공간은 경건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길게 늘어진 의자에 앉았다. 마음이 차분해지며,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듯한 편안함이 밀려왔다. 형도 같은 기분이었는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앞을 바라봤다. 여행 중 느꼈던 흥분과 설렘이 이 공간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름다운 풍경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행복,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만족감, 낯선 환경에서 마주하는 설렘,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경외감. 여행은 그런 감정들이 겹겹이 쌓이는 시간이다. 경외감이란 공경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다. 이곳은 그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행복했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다양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건강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들이 우리의 일상을 소중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가끔 멀리 떠나야 비로소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따뜻한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당을 나섰다. 아그리젠토의 오후는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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