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기 11 : 아그리젠토
시칠리아의 겨울은 한국보다 따뜻했다. 낮에는 맨투맨 티에 조끼 하나만 걸쳐도 춥지 않았고 해가 지면 조금 쌀살해 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밤에는 숙소의 컨디션에 따라 느껴지는 추위가 달랐다. 아그리젠토에서 첫날 우리가 묵은 숙소는 굉장히 추웠다. 가정집을 개조하여 여행자에게 빌려주는 형태로 작은 거실에 부엌이 함께 있었고 방 안에는 더블 침대와 싱글 침대가 있었다. 온풍기 1대가 방을 데우기 위해 밤새 바람을 뿜어 냈지만 추위를 막아주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벌벌 떨며 잠을 청해야 했다.
아그리젠토는 1박 일정이었기에 하루 동안 신전의 계곡과 터키인의 계단을 모두 봐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일정을 마친 후 저녁 버스를 타고 카타니아로 가야 했다. 춥게 잔 탓에 몸이 무거웠지만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하루를 시작했다. 메인 거리를 지나 관광 안내소 바로 앞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안은 동네 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TV 뉴스를 보고 있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사람, 에스프레소를 한입에 털어 넣고 급하게 길을 나서는 사람 등 카페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며 아침식사로 빵과 커피를 마셨다.
신전의 계곡
카페 근처에 위치한 정류장에서 신전의 계곡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신전의 계곡은 차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버스는 도시를 빠져나와 넓은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이나 표지판 하나 없는 길을 달렸다. 내려야 할 장소를 놓칠까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 기사님이 내리라는 신호를 주었다.
"내리세요!"
관광객으로 보이는 동양인이 신전의 계곡 입구에 도착했는데도 내리지 않으니 신호를 준 것이다. 정류장 근처는 기념품을 파는 가건물 말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아무것도 없으니 이곳이 신전의 계곡 입구라고 생각하기 힘든 곳이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 공터의 기념품 가게를 지나 안쪽으로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니 작은 매표소가 나왔다.
티켓을 구입하고 소지품 검사를 마친 후 신전의 계곡에 입장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기념품 가게를 지나 좁은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는 길을 5분 정도 걸어 올라가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노란빛의 드넓은 땅에 신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신전들은 20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가고 있었다.
무너져 가는 많은 신전들 중 가장 웅장하고 원상태를 대부분 보존하고 있는 신전이 하나 있었다. 그리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신전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볼 수 있다니 놀라웠다. 생각보다 큰 신전은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저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장 원래 모습을 간직한 신전의 아래, 사람의 모양을 한 청동 동상이 쓰러져 있었다. 청동 동상은 현대미술로 최근에 신전 앞에 세워진 것이었다. 동상은 바로 뒤의 신전처럼 오랜 시간 비와 바람을 맞아 무너지고 쓰러진 모습이었다. 간신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신전처럼 청동 동상은 세월의 흔적을 견디지 못하고 누워있는 듯했다. 2000년이 넘은 신전과 현대 작품인 청동 동상은 잘 어울렸고 신전의 계곡을 더 아름답게 했다.
신전의 계곡은 꽤나 넓은 곳이었고 걸으며 모든 신전을 보고 나니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신전의 계곡을 둘러보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했고 버스가 늦게 오며 계획했던 것보다 많이 늦어졌다. 아그리젠토 시내에서 터키인의 계단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터키인의 계단을 다녀오면 저녁 늦은 시간이 될 것이 뻔했다. A형과 나는 고민 끝에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일로 계획을 변경해야 하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나는 터키인의 계단을 포기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형은 아그리젠토가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곳이니 터키인의 계단도 분명 후회하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일정을 바꿔야 하는 일이었기에 우린 계속 고민했고, 결국 우리는 터키인의 계단을 여유롭게 보고 다음날 아침 카타니아로 가기로 했다.
터키인의 계단
숙소에서 캐리어를 끌고 언덕길을 간신히 내려왔다. 막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마치고 숙소 주인에게 물었다.
"지금 터키인의 계단을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는 게 빠를까요?"
"지금 간다고요? 지금 가면 해가 져서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버스를 타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려요."
호텔 주인은 지금은 터키인의 계단을 볼 수 없으니 내일 가는 것을 추천했다.
"우린 오늘 꼭 터키인의 계단에 가야 해요."
함께 고민을 하던 주인은 자신에게 요금을 지불하면 터키인의 계단까지 직접 바래다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내 차를 타고 가면 20분이면 터키인의 계단에 도착할 수 있어요."
우리는 너무나 좋았다. 내일 아침에는 카타니아에 가야 했기에 오늘 꼭 터키인의 계단을 봐야 했다.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호텔 앞에 주차된 차를 타고 터키인의 계단으로 향했다. 아저씨는 차를 빠르게 운전하여 20분 만에 해변에 도착했다. 아저씨를 따라 해변가로 내려가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돌계단 바로 아래에는 아름다운 레스토랑이 있었다.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저기가 터키인의 계단이에요. 나는 여기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구경하고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카페를 등지고 멀리 보이는 터키인의 계단까지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 터키인의 계단이 있었다.
터키인의 계단은 석회암으로 된 높은 절벽이다. 절벽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해변가를 보며 앉아 있었다. 절벽을 따라 올라가자 많은 연인들과 가족 단위의 사람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터키인의 계단에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스피커로 노래를 듣는 사람들 옆에 앉아 해가 지는 해변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석양이 지며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곧 해는 수평선 아래로 사라졌고 사람들은 하나둘 어둑해져 가는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페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는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덕분에 터키인의 계단을 볼 수 있었어요."
주인아저씨의 도움으로 노을이 지는 터키인의 계단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아저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늦은 시간 터키인의 계단에 도착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다 돌아왔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의 인생처럼 여행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행도 삶도 이런저런 일로 멈추고 흔들릴 때가 있다. 이때 작은 도움이나 조언은 큰 도움이 되곤 한다.
큰 기대 없이 방문한 아그리젠토는 그 어떤 도시보다 특별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아저씨의 차를 타고 돌아와 길을 걸었다. 첫날 아그리젠토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노란 불빛은 오래된 건물들을 비추었고 도시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거친 듯 보이지만 모두가 친절했다. 여행 일정을 바꿔야 하는 우려와 걱정으로 가득 찼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무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