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기 10 : 아그리젠토
성당에 앉아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고요한 성당에서 앉아있으니 명상을 한 것처럼 머리가 맑고 가벼웠다. 성당을 나와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메인 거리까지 내려갔다. 저녁시간이 되자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바쁜 일정에도 매일밤 저녁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밥을 해서 먹는 일은 꽤 많은 노력과 수고로움을 동반한다. 마트에서 재료를 구입하고, 주방 식기와 조리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요리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테이블을 정리하여 설거지까지 해야 저녁 식사가 끝이 난다. 여행을 하며 현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나름 재밌는 일이지만 여행이 10일째에 접어들자 몸이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그리젠토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작정이었다. 괜찮은 식당을 찾기 위해 메인 거리를 따라 걸었다. 시칠리아에서 유명한 관광지답게 많은 식당이 있었지만 유명한 식당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문 앞에는 '휴가 중'이라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1월의 시칠리아는 휴가 기간이어서 관광객도 많지 않았고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그래도 괜찮은 식당이 하나 있지 않을까 하여 1시간 동안 거리를 헤맸다. 걸었던 길을 3-4번 왔다 갔다 했을까 숙소로 올라가는 언덕 앞에 있는 식당에 눈길이 갔다. 세련됐지만 아그리젠토의 도시와 잘 어울리는 간판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가격이 비싸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예쁜 식당이었다. 하지만 식당 안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식당에는 주인 아저씨의 가족들이 있었고 아이들은 식당 안을 뛰어놀고 있었다.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주인 아저씨가 메뉴판을 건넸다. 메뉴가 굉장히 많았고 가격은 한국의 이탈리안 레스토랑보다 저렴했다. 번역기를 이용해 요리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도 많았다. 특히 전채요리는 특이한 메뉴가 많아 번역기로는 정확히 알 수 없어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봐야 했다.
"이 가지 요리는 뭔가요?"
"가지와 치즈를 같이 굽고 …"
주인 아저씨는 친절하고 상세하게 메뉴를 설명해 주었고 음식에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아저씨를 믿고 추천받은 음식과 맥주를 주문했다.
식당은 최근에 리뉴얼을 한 듯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깔끔했다. 넓은 창으로는 메인 거리의 풍경이 보여 퇴근길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주민들이나 동네를 구경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식전 음식으로 빵이 가득 담긴 라탄 바구니에 빼빼로보다 긴 길쭉한 과자가 함께 나왔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빵과 과자를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먹어 버렸다. 작고 둥근 바께트 빵은 감칠맛이 났다. 겉은 딱딱하지만 씹으면 안은 식빵처럼 부드러웠다. 과자는 살짝 짭짤하면서도 아삭아삭 씹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 과자 너무 맛있어요. 한국 가기 전에 많이 사서 가져가야겠어요."
과자 맛에 감탄하고 있을 때 전채 요리가 나왔다. 구운 감자 위에 버섯과 치즈가 올려져 있는 요리였다. 고소한 감자의 부드러운 식감과 감자 위에 올려진 치즈와 버섯이 부드럽게 씹히며 목을 따라 넘어갔다. 메인 메뉴로 봉골레 파스타와 스테이크도 바로 나왔다. 파스타는 고소한 조개 향과 파스타 면 위에 뿌려져 있는 치즈가 잘 어우러졌다. 스테이크는 손바닥보다 컸으며 굉장히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시칠리아에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으뜸이었다.
아그리젠토의 일정을 하루 연장하고 다음날 저녁에도 이 레스토랑을 다시 방문했다. 아저씨도 우리를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환영해 주었다.
"너무 맛있어서 다시 왔어요. 우리는 내일 카타니아로 떠나요. 다시 이곳에서 식사할 수 없는 게 아쉬워요."
"구글에 리뷰도 작성했어요. 보세요."
아저씨는 우리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포옹을 했다. 자리에 앉아 주인 아저씨의 추천을 다시 주문했다. 가지 그라탱, 크림 파스타, 화덕피자와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다. 기대했던 대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짧은 여행 일정에도 불구하고 2번, 3번 가게 되는 레스토랑이 있다. 김치와 라면, 한식을 가장 좋아하긴하지만 운 좋게 여행지에서 내 입맛에 딱 맞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많은 곳을 여행하며 이런 레스토랑을 만나면 오래오래 기억에 남게 된다. 당장 생각나는 최고의 레스토랑이 몇 군데 있다. 대만의 선술집 '죽촌'은 바 테이블에 앉아 타이베이의 랜드마크인 101 빌딩을 보며 술을 한 잔 할 수 있는 곳이다. 모든 안주가 다 맛있으며 대만의 분위기를 한 껏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쿠바 아바나의 레스토랑 'El levant'는 차이나 타운 근처에 위치한 곳으로 케밥, 피자, 파스타 등 다양한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다. 소스가 귀해 단조로운 맛의 음식들이 가득한 쿠바에서 매콤한 칠리소스가 들어있는 케밥은 쿠바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좋은 기억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도시의 풍경, 여행을 하며 우연히 만난 좋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어떤 레스토랑의 음식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가끔씩 내가 먹었던 그 음식들의 사진을 보면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나고 군침이 돌았다. 언젠가 다시 그 식당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