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기 01 : 코르티나 담페초
여행이 주는 설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때의 들뜸. 새벽 공기를 마시며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의 고요한 긴장감. 낯선 골목의 공기를 처음 마주할 때의 두근거림.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밀려오는 아련한 여운까지.
그 모든 설렘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그 순간이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지도 위에서 모든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기에,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문이 나를 향해 열려 있는 것만 같다.
점심시간, 밥을 먹고 나면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가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습관처럼 여행 블로그를 연다. 낯선 도시의 골목길 사진, 반짝이는 바다, 카페 앞에 놓인 의자 한 쌍 같은 풍경들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은 그곳에 가 있다. 창밖은 여전히 같은 풍경인데, 마음만은 이미 비행기를 탄 사람처럼 두근거렸다.
'아, 빨리 떠나고 싶다.'
그 한마디가 내 안의 시동을 거는 주문이었다.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 갖고 싶던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도 물론 좋다. 하지만 그런 기쁨은 대게 짧고, 쉽게 사라진다. 하지만 여행은 달랐다. 여행을 결심한 순간부터 설렘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마음속에 쌓였다.
업무에 지쳐 녹초가 된 날에도, 미리 예매한 비행기 티켓을 떠올리거나 여행 블로그를 열기만 하면 마음이 밝아졌다. 그 설렘은 생각보다 오래가고 깊었다. 현실을 버티게 하는 건 때로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머지않아 떠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시칠리아 여행도 그랬다. 비행기 표를 예매한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무슨 일이 있든 떠나리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은 늘 그랬다. 현실을 견디게 하는 약속, 그것이 나에게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13박 14일. 2박 3일씩 머물면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 여섯 곳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형, 여섯 개 도시로 짜 봤어요. 이틀씩 나눠서 돌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근데 나는 이탈리아에서 보드를 타고 싶은데..”
겨울마다 보드를 즐기는 A형은 이탈리아 북부의 스키장 정보를 찾아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며칠 후, 형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내가 알아봤는데 코르티나 담페초가 겨울 여행지로 좋대. 그리고 돌로미티 산맥 트레킹도 유명하다고 하더라. 어때?”
사실 나는 어디든 괜찮았다. 목적지 보다 함께 떠나는 그 순간이 더 중요했으니까. 진짜 여행은 지도를 펼칠 때가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열한 시간 비행 끝에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했다. 창밖은 눈이 소복이 쌓인 흰빛 세상이었다. 낯선 공기 속에서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일었다.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이고, 형과 나는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았다.
“렌터카 48시간에 10만 원도 안 해.”
“와, 괜찮네요?”
기본 보험이 포함된 차량이었다. 서류를 확인하고 차량 인수를 위해 외부로 나가자, 직원이 차를 보여주며 보험에 대해 설명했다.
"이 차는 500km도 타지 않은 새 차예요. 기본 보험이라면 범퍼는 600유로, 유리창은 1,000유로 정도죠."
우린 동시에 눈을 마주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 18만 원 더 내고 풀커버 보험 드는 게 낫겠어요.”
"좋지. 마음 편하게 타야지."
렌트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험비로 쓰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차량의 시동을 걸자, 엔진 소리와 함께 내 안에서도 묘한 긴장이 일었다. 창밖의 풍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공항을 벗어나 코르티나 담페초로 향하는 길. 눈 덮인 도로를 따라 달리며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짐을 싸고, 공항으로 향하는 순간이 결국 이 한 장면을 위한 것이었구나. 기다림이 현실로 바뀌는 이 짧은 찰나가, 내가 사랑하는 여행의 본질이었다.
나는 여행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고 하면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설렘"
여행과 설렘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리고 이번 시칠리아 여행도, 그 아름다운 감정으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