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았던 정책의 결과
보도권력을 해체하려다 생긴 우발적 수요 창출 효과
앞선 글에서 K-콘텐츠의 성장을 이끈 정부 정책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창작의 자유를 옭아매던 '검열'이라는 족쇄가 풀리면서 표현의 영역이 확장된 과정, 그리고 방송사 내부 제작에서 '외주 제작'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면서 독립 제작사들이 자본과 노하우를 축적하게 된 배경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콘텐츠를 만드는 ‘공급’ 시장의 변화를 초래한 정책이었다.
공급시장만으로 시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요 시장이 있어야 한다. 때론 공급이 그 자체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건 신사업일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리 뛰어난 공급자(제작사)가 창의적인 물건(콘텐츠)을 만들어 낸들 그것을 사줄 '구매자'가 없다면, 너무도 당연하게도, 시장은 커질 수가 없다. '외주 의무 제작'이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KBS, MBC 뿐이라면 오히려 양 방송사의 지배력이 더 강화될 뿐이다. 물론 정부가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정책을 집행했다고 볼 수 없는 정황은 넘쳐난다. 당시만 하더라도 방송을 산업으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보도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애당초 목적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역사고 사람의 일이다.
이번 글에서는 199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미디어 정책이 '어떤 반발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플랫폼들을 탄생시켰고, 이 플랫폼들이 어떻게 K-콘텐츠에 대한 거대한 '국내 수요'를 창출해 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K-콘텐츠의 폭발적인 성장은 바로 이 '수요의 폭발' 위에서 가능했다.
1. 첫 번째 수요 확대: '민방 도입'이라는 정치적 결단
1980년대까지 한국의 방송 시장은 KBS와 MBC라는 양대 공영방송 체제(사실상 KBS 중심의 국가 통제)하에 있었다. 그나마 있었던 동양방송(TBC)은 1980년 언론통폐합되면서 강제 폐국되었고, KBS에 통합, KBS2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우리의 방송시장은 관제화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 '관제 방송' 독점을 깨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빗발쳤다.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튀어나온 정책이 바로 ‘민영 방송 도입’이었다. 이 과정에서 방송제도연구위원회가 1990년 4월 민영방송 도입 필요성을 설파한 보고서를 공개했고, 1990년 8월 이를 수용한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예상했듯이 KBS, MBC 양대 방송사는 당연히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가 위협받는 것을 우려해 반발했다. 시민사회와 학계 일각에서도 "상업주의가 판을 쳐 방송의 공공성이 무너질 것"이라며 반대를 분명히 했다. 천박하고, 돈만 밝히는 ‘상업’은 "선정적이고 자극적” 일 것이라는 주장은 힘을 가지고 국민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방송 활성화'와 '다양성'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정치권력이 방송에 대한 영향력을 재편하기 위해서 밀어붙였다. 1991년 서울방송(SBS)이 출범했다. 이 정치적 결단은 당장 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일찍이 방송시장에서 없었던 일들이 발생했다. 이른바 스카우트 전쟁이다. 방송이라는 것이 아무나 데려다 놓는다고 방송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SBS는 가장 먼저 KBS와 MBC의 핵심 인력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시장에 '구매자'가 고작 하나 더 생겼을 뿐인데, 핵심 자원중 하나인 ‘방송인력’의 몸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2~3배의 연봉이 제시되기도 했다. 겉으론 정부의 방송 장악 시나리오가 작동되고 있다며 비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몸값이 높아지는 것이 달갑고도 기쁜 일이었다.
이 '정치적 결단'과 '스카우트 전쟁'은 즉각적인 '편성 파괴'와 '콘텐츠 실험'으로 이어졌다. 격렬한 반대 속에서 태어난 SBS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이들은 "뉴스는 9시"라는 KBS, MBC의 철옹성을 깨기 위해 '8시 뉴스'를 전진 배치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심지어 뉴스 앵커로 모델 출신의 신인 이혜영을 기용하는 등, '새로움'을 각인시키기 위한 충격 요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시도는 화제성은 컸으나 뉴스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 속에 단명했지만, '기존의 문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SBS의 공세적인 태도를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존 방송사의 문법을 답습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도시적이고 트렌디한 감각의 드라마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었다. 물론 초기에는 <열정시대> 같은 야심작들이 기존 방송사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하는 등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SBS의 공세는 '잠자던 사자'였던 KBS와 MBC를 깨웠다. 인력 유출에 충격을 받은 양사는 스타 PD와 작가들을 지키기 위해 연봉을 인상하고 제작 환경을 개선하는 등 '집안 단속'에 나섰다. 콘텐츠 경쟁도 불붙었다. SBS의 트렌디 드라마 공세에 맞서, '드라마 왕국' MBC는 최진실, 최수종 주연의 <질투>(1992)라는 기념비적인 트렌디 드라마를 탄생시키며 맞불을 놓았고, KBS는 <내일은 사랑>(1993) 같은 청춘 드라마로 젊은 시청자 확보에 나섰다.
이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SBS는 마침내 <모래시계>(1995)라는 결정타를 날렸다. 이 드라마는 민방이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든 스케일과 작품성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SBS도 KBS, MBC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이후 <좋은 친구들>, <호기심 천국> 등 새로운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들까지 성공시키며 SBS는 1990년대 중후반, 불과 몇 년 만에 양대 공영방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3의 방송사'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오늘날 '지상파 3사'라는 표현을 안착시켰다. 결국 SBS는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파격적인 실험, 그리고 이에 대응한 기존 강자들의 반격이 어우러지며 90년대 K-콘텐츠의 질적, 양적 팽창을 이끄는 첫 번째 방아쇠가 되었다.
2. 두 번째 내수 시장 확장: '케이블 TV'라는 고난의 행군
1995년, 김영삼 정부는 '정보화 사회'를 내걸고 야심 차게 케이블 TV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처참한 실패에 가까웠다. 20여 개 채널로 시작했지만, 비싼 가입비와 볼 것 없는 콘텐츠로 시청자의 외면을 받았다.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알려지면서 삼성 등 대기업의 참여가 이어졌지만, 초기 가입자는 지지부진했다.
국내 최초로 대기업의 산업 자본이 콘텐츠 제작 뛰어들었다. 자본이 본격 투자되면서 우수 인력들이 지상파(언론사) 말고도 몰리기 시작한 건 고무적이다. 현재 방송계의 핵심세력들이 이때 등장했다. 비록 IMF(빅딜)로 다 퇴출됐지만 한때 삼성(영상사업단) 대우전자 현대(금강기획) 코오롱 동양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투자를 했고 제작기반을 확충했으며 그게 고스란히 지금의 CJ를 만들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삼성과 대우의 영화사업 본격 투자는 당시 기획시대나 시네2000 같은 기획사/제작사의 탄생을 만들었고 충무로(극장) 중심의 제작-배급구조를 일거에 바꾼 계기였다.
이번에도 기득권이 된 지상파 3사(KBS, MBC, SBS)의 반발은 거셌다. 광고 시장이 쪼개질 것을 우려한 이들은 케이블 채널이 스포츠 중계권이나 핵심 오락 프로그램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로비를 벌였고, 정부는 이들의 반발을 일부 수용해케이블 채널에 여러 규제(광고 총량, 장르 제한 등)를 두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웠던 케이블 시장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반전은 2000년대 초, 정부가 기존의 제도권 밖에 있던 '중계유선방송(RO, Relay Operator)'을 흡수·통합(양성화)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수백만 가구를 확보하고 있던 이 RO망이 케이블 TV의 가입자 기반으로 편입되자, 시장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가입자 기반이 확보되자, 광고 매체로서의 가능성이 입증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채널 사업자(PP)'들 간에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초기 20여 개였던 채널은 100개를 훌쩍 넘기며 폭증했고, 이 '쩐의 전쟁' 속에서 시장은 M&A(인수합병)를 통해 거대 'MPP(다채널 사업자)'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이 합종연횡의 정점에 바로 CJ그룹이 있었다. CJ는 Mnet, OCN 등 여러 채널을 운영하며 축적한 자본력과 노우를 바탕으로, 2006년 지상파와 정면승부를 선언하며 'tvN'을 개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지상파의 견제와 정부의 '제한'이 만들었던 '틈새시장'이 이들의 자양분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 이들은 지상파가 외면했던 청춘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K-Pop(Mnet), 마니아적 장르 영화(OCN) 등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노하우를 확보한 이들은 지상파의 문법을 깨는 '대형 콘텐츠'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훗날 <응답하라> 시리즈나 <미생> 같은 작품은, 이 '고난의 행군'과 '시장 재편'이라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K-콘텐츠의 문법을 깬 결정적 산물이었다.
3. 수요의 빅뱅: '종편'과 'IPTV'라는 이중의 충격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 초, K-콘텐츠의 국내 수요 시장은 '빅뱅'을 맞이한다. 지상파급의 종합편성채널과 케이블과는 다른 인터넷 기반의 IPTV가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종합편성채널은 요란법석하게 등장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문과 방송의 경업 이슈는 정치판을 흔들었다. '종합편성'이란, tvN 같은 전문 장르 채널(PP)과 달리 '보도(뉴스)'를 포함한 모든 장르의 편성이 가능한, 사실상의 '제2의 지상파'를 의미했다. 이는 지상파 3사가 과점해 온 '여론 시장'과 '콘텐츠 시장'을 동시에 재편하려는 강력한 정책적 의도의 산물이었으며, "특정 언론사에 대한 정치적 특혜"라는 반발은 국회에서의 물리적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이 엄청난 진통 끝에 탄생한 종편 4사는 '생존' 자체가 지상과제였다. 이들은 모태인 보도 부문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었다. 정부가 허가 조건으로 내세운 자체 제작 비율을 준수하고, 시장 내에서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지상파, 그리고 tvN과 정면승부를 벌여야 하는 '드라마'와 '예능'이라는 가장 비싼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는 K-콘텐츠 시장에 4개의 거대한 '신규 구매자'가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개국 초 막대한 자본잠식을 감수하면서까지 콘텐츠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JTBC는 개국 초부터 김수현 작가의 <무자식 상팔자>, 노희경 작가의 <빠담빠담> 같은 대형 드라마를 론칭했고, <히든싱어>, <비정상회담> 등 보도 이외의 예능에서도 연이어 성공을 거두며 '드라마/예능 시장'의 강력한 구매자로 급부상했다. 정부 역시 이들의 안착을 위해 지상파 바로 다음인 '황금채널'을 배정해 주었다. SBS 개국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스타 작가와 PD의 몸값은 다시 한번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IPTV(인터넷 TV)’는 새로운 수익원을 제시했다. 2008년 본격화된 IPTV 정책 역시 '방송'을 하려는 통신사(KT, SK 등)와 '통신'을 견제하려는 방송사 간의 '영역 다툼' 산물이었다. 그러나 방송 제작사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다. 바로 VOD 시장의 등장이다. 당연히 본방송과 재방송이 기본이었던 시장에서 (제한적일 망정) 시간적 제약 없이 드라마 등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VOD의 경우에는 단품 구매나 구독제 서비스로 발전했고, 그 수익의 상당 부분이 콘텐츠 사업자에게 돌아가면서 오리지널 프로그램을 가진 방송사업자들에게는 새로운 수익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광고 수익이라는 단일 수익 모델을 가진 방송사업자들에게는 단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덧붙여 IPTV는 '채널 수신료 배분' 경쟁을 촉발시켰다. 과거 케이블 TV(SO)가 플랫폼 시장을 독점하며 PP(채널 사업자)와의 협상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면, 이제는 IPTV라는 거대 통신 자본이 '가입자 확보'를 위해 tvN, 종편 등 인기 채널 유치 경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 결과, 채널을 공급하는 PP들의 협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고, 플랫폼(SO와 IPTV 모두)이 PP에게 지불하는 콘텐츠 대가(수신료 배분액)의 총량이 크게 증가했다.
결국 2010년대 초, '종편'이라는 공격적인 신규 구매자가 제작 '수요'를 폭발시키고, 'IPTV'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VOD와 수신료 배분 경쟁을 통해 '수익'을 다각화시키면서 K-콘텐츠 시장은 전례 없는 '빅뱅'을 맞이했다.
4. 의도하지 않았던 갈등이 빚어낸 거대한 용광로
K-콘텐츠의 성장을 논할 때 흔히 창의적인 인력이나 한류 열풍을 먼저 떠올린다. 사업자의 고난과 전 세계를 돌면서 작품 하나하나를 판매하려고 하는 이들의 고생담이 떠오른다. 이 대목에 항상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정부가 한류의 성장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의도된 것은 아니나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서 콘텐츠의 수요가 늘어나고, 경쟁이 촉진되면서 결과적으로 품질도 높아졌다는 점을 부인하기도 힘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여전히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정부가 역할했다는 평가에 탐탁지 않아하는 지인들은 많다.
서울 민방이나 종합편성채널은 그 산업적 기여와는 별개로 지상파가 보도를 독과점하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긴 힘들다. 그럼에도 그 의도와 과정을 빼고 결과로만 본다면 지난 30년간 정부의 '경쟁 정책’으로 인해서 내수 시장이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성장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냐는 질문에 단 한 줄도 답을 한다면 이럴 것 같다. '의도하지 않았던 긍정적 결과'라고 말이다.
검열 규제가 풀린(2부) 창작자들이, 외주 제작이라는 전문화된 시스템(3부)을 갖추고, 보도 권력을 해체하려는 시도에서 시작한 경쟁 도입이 가져온 신규 구매자들(4부)을 상대로 마음껏 '쩐의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된 것. 이 치열한 국내 시장이라는 용광로에서 단련된 K-콘텐츠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경쟁력과 자본력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평가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이렇게 정리하면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꽃길만 걸어온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순탄한 적은 없었다. 2부 외부 환경 편에서는 고비고비마다 사업자들을 한쪽 방향을 쳐다보게 만들었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K-영상산업의 성공 비결>(The Secret behind Global Success of K-Drama)는 매주 찾아옵니다. 미디어 산업 전문가인 조영신 박사가 그 이면을 하나씩 정리해 드립니다.
서문: K-영상산업의 성공신화: 그 비밀을 파헤치다
Part 1. K-드라마 성공 신화의 정책 기반
1. 검열폐지, 창작자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다.
2. 3% 나비효과, 외주 제작 의무화 정책이 산업을 만들다
3. 보도 권력을 통제하려다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