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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나비효과

외주제작 의무화 정책, K-콘텐츠 신화를 쏘아 올리다


정부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하나가 어떻게 K-콘텐츠라는 거대한 홈런이 되었나. 방송사의 단단한 성벽에 균열을 낸 ‘3%의 나비효과’ 추적기


PART 1의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외주 제작 의무화 정책’입니다.


씨를 뿌리고 물과 거름을 주며 관리하면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하죠. 그런데 모든 생명이 그렇게 시작하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린 압니다. 바람결에 날아와 콘크리트 바닥 틈새에서 피어나는 들꽃은 누가 씨를 뿌리지도, 관리하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자라납니다. 지구가 자전하고, 바람이 불고, 그 바람결에 실려가기 위해 씨앗이 자신을 가볍게 진화시킨 결과이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면 바람 덕이고, 지구 덕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로 무대를 확장시키는 한국 방송 콘텐츠의 성공 뒤에도 이처럼 결정적인 바람과 빗물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이야기하려는 ‘외주 제작 의무화 정책’입니다. 1980년대 말 민주화의 결과로 얻어낸 ‘검열 폐지’가 창의력을 억압하던 봉인을 해제했다면, ‘외주 제작 정책’은 방송사의 통제권을 약화시켜 제작의 민주화를 가져온 첫 번째 동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의 방송 시장은 KBS와 MBC, 양대 공영 방송사가 모든 것을 도맡는 '인하우스(in-house)' 시스템의 시대였습니다. 기획부터 촬영, 편집, 송출까지 전 과정을 방송사 내부 인력이 담당했죠. 척박했던 초기 시장에서는 안정적인 제작 환경을 보장하는 이 시스템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공영’의 뒷면에는 거대 방송사 특유의 경직된 관료주의, 제한된 인력 풀로 인한 소재의 한계, 창작의 자율성 부재라는 문제점 역시 존재했습니다. 물론 당시 공영 방송에 몸담았던 분들은 섭섭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콘텐츠는 획일화되었고 소수의 방송사가 모든 권력을 쥔 독과점 구조는 고착화되었습니다. 가령 주말 저녁이면 양쪽 방송사 모두 대가족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비슷한 톤의 가족 드라마를 방영했고,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려도 비슷한 이야기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소재나 파격적인 형식의 콘텐츠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도 한몫했죠. 군부 독재 시절에 자유로운 상상력이 피어나길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니까요.


이러한 구조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독과점 타파와 규제 완화 요구가 거세졌고, 방송 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론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방송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1989년에 설립된 방송위원회는 방송제도개선연구회를 운영하면서 다음 세대 방송 정책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1991년 최초의 민영 상업 방송사인 SBS의 출범이었습니다. SBS의 등장은 그 자체로 KBS-MBC 양강 구도를 깨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한정된 방송 채널이라는 '희소 자원'을 둘러싼 경쟁의 서막을 연 것입니다. (이 대목은 다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가 방송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던 의도가 숨어있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민주화 시대에 공영방송이 정권과 거리 두기를 하자, 노태우 정부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상업 방송의 도입을 서둘렀다는 분석입니다. 방송 권력이라는 잣대로 보면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한류’라는 산업적 틀에서 보면, 상업 방송의 출연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외주제작 의무편성 제도’입니다. 경쟁 체제를 더욱 활성화하고 방송 콘텐츠 시장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도 있었죠. 1991년 방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방송사가 전체 프로그램의 일정 비율 이상을 외부 독립 제작사에서 구매하여 편성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에는 3%라는 미미한 수치로 시작했지만, 이는 방송사라는 굳게 닫힌 성문을 열고 외부의 새로운 피를 수혈하기 시작한 역사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방송 후진국이었습니다. 지금은 방송 시장을 이야기하면서 외국 시장 자료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않지만, 1990년대에는 달랐죠. 우리의 시선은 모두 해외로 향해 있었습니다. 외주제작 의무 정책 역시 참고할 모델이 있었으니, 바로 영국의 채널 4와 미국의 ‘Fin-syn Rule’이었습니다.


영국의 성공 사례를 본떴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벤치마킹 대상은 영국의 '채널 4(Channel 4)'였습니다. 1982년 설립된 채널 4는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하지 않고 100% 독립 제작사에 외주를 맡기는 '발행-편성 전문 방송사(Publisher-Broadcaster)' 모델을 채택했습니다. 이 단 하나의 결정이 창의성을 위한 경쟁 시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채널4.png https://blog.naver.com/5sin/223733713652?photoView=0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바로 ‘필름 온 포(Film on Four)’ 시리즈입니다. TV와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대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동성애 문제를 다룬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1985)와 같은 예술성과 사회성을 겸비한 작품들을 탄생시키며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과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같은 인물들을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정책의 산업적 효과는 엄청났습니다. 1982년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영국의 독립 제작사 생태계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2000년대 초반에는 700개가 넘는 제작사가 활동하는 수십억 파운드 규모의 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단순히 프로그램을 납품받는 것을 넘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제작 생태계 자체를 키워낸 이 정책은 영국 방송 산업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은 채널 4의 핵심 철학, 즉 '독립 제작사 생태계 육성을 통한 콘텐츠 다양성 확보'를 정책 목표로 삼았습니다. 외부 제작사에 기회를 줌으로써 방송사 내부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장르와 소재를 발굴하고, 산업 전체의 파이를 키우고자 했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영국과는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새로운 방송사를 도입해 시장 전체를 움직이려 하기보다는, 기존 방송사의 힘을 일부 분산시키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영국은 채널 4라는 새로운 주체를 통해 외주 제작 모델을 시장에 안착시켰지만, 한국은 이미 막강한 제작 역량을 갖춘 KBS, MBC, SBS라는 기존 플레이어들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기존 방송사들은 여전히 거대한 '제작자'이자 동시에 외부 콘텐츠를 구매해야 하는 '구매자'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된 셈이죠.


이는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한 절충안이었지만, 훗날 방송사와 제작사 간의 고질적인 불공정 계약과 제작사들이 훗날 넷플릭스로 달려가는 원인을 제공한 셈입니다. 즉, '슈퍼 갑(甲)'인 방송사의 권력 남용 문제를 야기하는 씨앗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3%의 균열에서 터져 나온 <모래시계>, 스타 PD들의 독립 시대를 열다


하지만 인하우스 시스템에 균열을 낸 것만으로도 방송 시장의 풍경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3%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확대된 의무 비율은 독립 제작사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월급쟁이에 만족하지 못한 능력 있는 작가와 연출자들이 방송사 밖으로 나갈 명분을 제공한 것입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이 그렇듯, 처음은 미미했습니다. 정책 시행 첫해인 1991년, 의무 편성 비율은 고작 3%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70여 개에 불과했던 제작사들은 대부분 방송사 출신 PD들이 설립한 소규모 형태였고, 주로 단막극이나 교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방송사들은 여전히 외주 제작에 소극적이었고, ‘구색 맞추기’ 용으로 비인기 시간대에 외주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무 비율이 10%로 상향 조정된 1995년, 시장의 판도를 바꿀 영웅이 탄생합니다. 오늘날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있다면, 1995년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김종학 감독이 있었습니다. 1991년 <여명의 눈동자>로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김종학-송지나 사단은 1995년 독립제작사 ‘김종학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SBS를 통해 드라마 <모래시계>를 선보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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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내부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신생 외주사가 시대극, 그것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는 대작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적인 시선이 팽배했지만, 김종학 프로덕션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최초로 공중파 드라마에서 재현하는 등, 기존 방송사 드라마의 문법을 뛰어넘는 과감한 시도와 압도적인 스케일, 사회를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모래시계’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거리가 한산해져 ‘귀가 시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고, 최고 시청률 64.5%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모래시계>의 성공은 "외주 제작 프로그램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방송가의 편견을 완벽하게 깨부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창작자라도 방송사의 그늘을 벗어나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통념을 명징하게 깨부순 것입니다. 영웅은 길을 만듭니다. 길이 만들어지니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당연히 나오기 마련이죠. 실력 있는 PD와 작가들이 안정적인 방송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이름을 건 제작사를 차리는 '창업 붐'이 일어났습니다. 1999년, 드라마 독립 제작사 수는 200여 개를 넘어섰습니다. 물론 IMF 외환위기로 인한 방송사 구조 조정이 창업을 부추긴 측면도 있었습니다.


정부는 2000년, 새로운 방송법을 통해 외주 제작 정책에 더욱 힘을 실어줍니다. 의무편성 비율은 20%로 상향되었고, 2002년에는 30%, 2008년에는 지상파 기준 40%까지 늘어났습니다. 이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정부가 자신들의 성장 동력을 빼앗았다고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특정 장르는 의무 비율이 더 높게 책정되면서 제작사들의 전문화와 대형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식 시장에 상장하는 제작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고요. 이 시기 독립 제작사 수는 600개를 돌파하며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 속에서 한류의 초석을 다진 명작들이 탄생합니다. 팬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겨울연가>(2002)는 일본에서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류의 문을 활짝 열었고, 초록뱀미디어가 제작한 <올인>(2003)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분야에서도 외주 제작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코엔미디어가 제작한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 공포의 쿵쿵따>(2002)는 새로운 형식의 게임 버라이어티로 큰 인기를 끌며 예능 외주 제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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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 제작사 수는 1,500개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지만, 동시에 제작사 간의 치열한 경쟁은 콘텐츠의 품질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습니다. 제작 현장은 치열한 경쟁으로 버겁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시청자들은 수준 높은 콘텐츠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부터는 단순히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것을 넘어, 기획 단계부터 작가와 배우를 확보하고 막대한 자본을 유치하여 '슈퍼 IP'를 만들어내는 대형 스튜디오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HB엔터테인먼트의 <별에서 온 그대>(2013), NEW의 <태양의 후예>(2016), 스튜디오드래곤의 <도깨비>(2016) 등은 국내를 넘어 아시아 전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 K-드라마의 위상은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쌓아 올려진 것입니다.


이러니 외주 제작 정책이 오늘날 한류를 키워낸 결정적인 바람과 빗물이었다는 평가가 틀리지 않은 것입니다.


독점은 막았지만, 외주 정책은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을 낳았다


다만, 이 정책의 성공 여부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평가는 달라집니다. 방송사의 독점적 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방송사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편성권을 쥔 소수의 방송사와 프로그램을 공급해야 하는 수백 개의 제작사 관계는 결코 대등할 수 없었습니다. 방송사가 제작비를 온전히 투입하지 않으면서도 IP(지식 재산권)를 독점하는 구조는 외주 제작 시스템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편성과 유통을 독점한 방송사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제작사에 불리한 계약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제작사들이 공개적으로는 OTT를 비판하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방송사의 불공정 관행을 더 문제 삼는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빠듯한 제작비, 저작권(IP)의 방송사 귀속, 무리한 PPL 요구 등은 독립 제작사의 재투자를 어렵게 하고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야기하는 고질병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방송사가 앞장서 IP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의 등장으로 방송사의 힘이 약해지면서 제작사가 IP를 소유할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확보한 IP를 활용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는 새로운 고민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래저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은 셈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여기까지 정리하려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정부 정책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K-영상산업의 성공 비결>(The Secret behind Global Success of K-Drama)는 매주 찾아옵니다.

서문: K-영상산업의 성공신화: 그 비밀을 파헤치다

Part 1. K-드라마 성공 신화의 정책 기반

1. 검열폐지, 창작자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다.
2. 3% 나비효과, 외주 제작 의무화 정책이 산업을 만들다
3. 보도 권력을 통제하려다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다

Part 2. K-드라마 성공을 이끈 내외 환경
1. 들끓는 욕망이 이끈 TV 시대
2. 절망의 겨울, 역설의 싹이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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