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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변심의 순간들

넷플릭스의 WBD 인수를 어떻게 봐야 할까? (2)

넷플릭스가 WBD를 인수한 뒤 벌어질 세상은 한국의 미디어 사업자가 살아가야 할 미래다. 그러기에 영화시장이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넷플릭스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인상평을 넘어서 조금은 꼼꼼하고 세심하게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준비한 글이다.


2024년 말 WBD에 대한 매각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때 인수 대상자가 넷플릭스를 염두에 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글로벌 IT 기업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고, 미디어 기업들 중에 성장을 도모하는 몇몇 사업자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그 예비자 명단에 넷플릭스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넷플릭스는 인수합병보다는 스스로 빌드업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 왔다.


"우리는 미디어 제국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건설할 것입니다.
(We are builders, not buyers.)"


2022년 12월, 넷플릭스 공동 CEO인 테드 서랜도스(Ted Sarandos)가 한 말이다. 이 원칙은 넷플릭스의 불문율과도 같았다. 2024년 말,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가 매물로 나왔을 때도 넷플릭스는 이 기조를 유지하며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그러던 넷플릭스가 돌연 입찰 경쟁에 자신을 올리더니, 2025년 12월 5일, 돌연 태도를 바꿔 827억 달러(약 117조 원)라는 거금을 베팅하며 판을 엎어버렸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관심이 없는 것처럼 포커 페이스를 했을 수도 있지만, 지난 세월동안 지켜왔던 자신들의 원칙을 버릴만한 그런 순간 말이다. 이 순간을 정리하면 넷플릭스가 왜 WBD를 인수하려고 했는지도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일단 WBD는 초기에 매각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재무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 파라마운트 같은 회사들이 매각 의사를 타진하기 시작하면서 WBD의 이사회가 매각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 현재까지 언론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 것들이다.

여기서부터는 넷플릭스가 공식적으로 천명한 내용들이 아니다.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취합한 뒤 내가 내린 결론에 가깝다. 언론 자료와 여러 상황들을 나 스스로 재구성하다보며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순간들일 뿐이다.


첫번째 계기는 <Kpop Demon Hunters>(이하 KDH)의 성공이다. 알다시피 KDH는 제작사인 소니도, 넷플릭스도 이 정도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경우다. 넷플릭스가 KDH 관련한 MD 상품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2025년 6월 공개된 KDH는 단순한 히트를 넘어섰고, <겨울왕국>을 압도했다. 8월이 되자 OST가 빌보드 1위를 찍고, 전 세계 10대들이 틱톡 챌린지를 하고, 할로윈 코스튬이 선주문만으로 매진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경영진은 이 순간, "이것이 우리의 겨울왕국(Frozen)이다"라는 확신을 얻었다. 넷플릭스도 10년, 20년 가는 슈퍼 IP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사실 넷플릭스도 조심스럽게 IP 사업을 준비중이었다. 2023년말 데드 서랜도스는 기존의 단발성 팝업 스토어 실험(오징어 게임 체험관 등)을 넘어, 영구적인 오프라인 공간을 만들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팬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넘어, 그 세계관 안에서 먹고, 쇼핑하고, 놀게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2024년부터 미국 내 대형 쇼핑몰의 빈 백화점 자리(약 2,800평 규모)를 임대해서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넷플릭스 하우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https://youtu.be/brybrNxvOyw?si=LlxVrSh6EQn0o2hU

2025년 11월 12일 펜실베이니아주 킹 오브 프러시아(King of Prussia) 쇼핑몰에 1호점을 오픈했고, 12월 11일에 텍사스주 갤러리아 댈러스(Galleria Dallas)에 2호점을 선보였다. 차마 디즈니처럼 테마파크(Theme Park)란 표현은 붙이지 못하고 ‘몰입형 체험 공간(Immersive Experience Venue)’ 혹은 '체험형 리테일(Experiential Retail)'이라고 불렀다. 넷플릭스가 자랑하는 IP를 활용했다.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 오징어 게임 (Squid Game), 브리저튼 (Bridgerton), 웬즈데이 (Wednesday), 원피스 (One Piece) (실사판), 그리고 KDH가 들어갔다. 그러나 KDH를 제외하고 가족형이라고 부르긴 좀 애매하다.


처음 넷플릭스 하우스를 기획했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모든 가족이 참여해서 놀만한 IP가 없었던 넷플릭스에게, 디즈니처럼 IP 왕국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있을 지언정 그럴 처지가 아니었던 넷플릭스에게 이젠 겨울왕국을 넘어선 메가 IP를 확보한 사업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반면에 KDH 외에는 사람들을 끌어모을 '지속 가능한 IP'가 턱없이 부족함도 동시에 깨달았을 것이다. 앞으로 꾸준히 노력하겠지만, 이와 같은 메가 IP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온 세월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디즈니가 100년 동안 쌓아온 숲을, 넷플릭스가 이제 막 심은 묘목 몇 그루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가능성은 봤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메가 IP를 가지고 있는 기업을 인수하면 된다. 메가 IP가 풍부한, 그러면서도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WBD를 통째로 사서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내부적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확률적으로 타당하지 않을까?


두번째는 아마존의 등장이었다. 초기 WBD 인수 고민을 했던 컴캐스트는 독과점 우려 때문에 조기에 손을 털었고, 애플로 살짝 고민을 하다가 포기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KDH가 터지기 전이다. 상황은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마존이 등장했다. 그것도 컴캐스트나 애플과는 달리 소위 예비 실사(Preliminary Due Diligence)를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졌다. 이미 MGM이란 기업을 인수한 적이 있는 아마존이다. 그런 아마존이 다시 WBD 인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건 넷플릭스에게는 위협적이다. 결과적으로 아마존은 독과점 이슈등이 부각되면서 사실상 인수전에서 이탈했다.


아마존에게 스트리밍 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은 미끼 상품에 불과하다. 기저귀와 화장지를 비롯해서 이런 저런 생필품을 파는 커머스 사업자가 구매자를 락인(Lock-in)시키기 위한 괜찮은 전략이다. 이런 아마존이 WBD를 인수해서 <해리포터>, <DC 배트맨>, <왕좌의 게임>을 프라임 멤버십의 '무료 혜택'으로 풀어버린다면 넷플릭스 구독자의 이탈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아마존이 가지고 있는 무제한 자금력으로 지속적으로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확보할 경우 넷플릭스의 구독 모델 자체를 '가성비 떨어지는 상품'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더구나 아마존은 대표적인 광고 사업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넷플릭스가 성장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광고 요금제에도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존이 WBD 인수를 막는 것이 넷플릭스 입장에서는유리하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방어전(Defensive War)'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아마존이 예비 실사를 진행했다는 것은 워너브라더스 이사회가 "우리는 팔 준비가 되었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팔겠다는 의사가 없는데, 입질을 하는 경우와 팔겠다는 의사는 확연히 다르다. 팔겠다는 의사가 드러난 순간 팔아야 하고 누군가는 사 간다는 말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산다(Now or Never)." 따라서 넷플릭스는 아주 진지하게 상황을 판단해야만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넷플릭스의 고민거리를 해결할 한 수가 튀어 나왔다. 존 말론(John Malone)의 등장이다. 이제는 한국에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존 말론이지만, 1970~90년대 미국 케이블 TV 산업을 통합하며 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케이블 카우보이(Cable Cowboy)란 닉네임으로 유명하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과 경쟁자를 제압하는 거친 사업 스타일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현재는 '리버티 미디어(Liberty Media)'의 의장이자, 미디어 업계의 '대부(Godfather)'다.


특히 존 말론은 헐리우드의 화려함이나 예술성보다는 EBITDA(현금 창출 능력)와 주가를 철저히 우선시한다. 돈이 안 되거나 주가에 방해가 된다면, 100년 된 브랜드(CNN 등)라도 언제든 팔아치우거나 쪼갤 수 있는 냉정한 투자자이기도 하다. 디스커버리(Discovery)의 최대 주주였으며, AT&T로부터 워너미디어를 떼어와 디스커버리와 합병시켜 지금의 WBD를 만든 설계자이기도 하다.


https://youtu.be/QHF5NyVMhSo?si=S5oZu7X6QBqbDwb2


그런 존 말론이, WBD 이사회의 명예회장(Chair Emeritus)이기도 한 존 말론이 2025년 9월 6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주주 가치를 위해 회사를 쪼개는(Split)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자산 분리(Spin-off)'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굳이 정부 규제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갈 만한 뉴스/스포츠를 인수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생긴 것이다. 이 구조적 해법이 제시된 직후, 넷플릭스는 비밀 TF를 구성하고 10월부터 본격적인 단독 협상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 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12월 5일 WBD 인수를 공식 선언했다.


디즈니와 같은 사업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

그러나 디즈니와 같은 가족용 IP는 없다.

잠재적으로 가장 큰 위협이 될 아마존이 예비 실사를 진행중이다.

근데 WBD 전체가 아니라 스튜디오(게임 포함)와 HBO만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넷플릭스는 100년 헐리우드 역사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넷플릭스의 WBD 인수를 어떻게 봐야 할까? (1)플릭스의 WBD 인수를 어떻게 봐야 할까? (1)

넷플릭스의 WBD 인수를 어떻게 봐야 할까?
1. 넷플릭스 제국의 완성, 827억 달러는 비싸지 않다
2. 넷플릭스, 변심의 순간들
3. 넷플릭스는 WBD를 감당할 수 있을까? 딜 조건, 지급 방식, 시너지
워너의 살아온 역사
6. Time-Warner의 화양연화 (~2000)
5. 슈퍼맨으로 흥하고, 아타리로 망하다 (~1989)
4. TV 시대 속 워너 브라더스: 길을 잃은 거인 (~1967)
3. WBD, 전쟁/반독점의 시대를 넘어서 (~1940s)
2. Dark한 캥스터 무비 (1927~1939)
1. Warner Bros. 의 이름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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