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잘 지내고 있니?

나는 궁금해.

by 해인



Another lover hits the universe.

The circle is broken.

But with death comes rebirth.

또 다른 사랑이 우주를 때리고

순환의 고리는 망가진다.

그러나 늘 죽음의 곁에는 부활이 함께 오지.

앨런 긴즈버그



*

'야망'을 주제로 한 글쓰기 강의가 끝나고, 동생이 말했다.


“언니의 야망은 그 사람이잖아. 왜 그 얘기를 쓰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살아있는 야망이 있었다. 언젠가 언제까지라도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하고 싶다는, 삐뚤고 글러먹은 야망이.

어떻게 그녀를 떠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꼭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꼭 쥐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만났다.

내가 실패한 해외취업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한인타운 초입의 이상한 바에서.



여느 때처럼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가게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이었다. 용건을 물어보니 가게가 바빠서 하루 일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 목선을 살짝 덮는 단발머리에 보는 사람도 시원한 민소매 원피스. 목부터 쇄골을 지나 팔을 덮은 문신이 원피스의 끈 사이로 드러나 보였다. 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사장과 친한 포주의 집에 살고 있는 아가씨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머리 색깔이 다양하지도, 화려하고 높은 힐을 신지도 않아 눈에 띄었던 사람.

나는 물을 따라주고 손님 응대를 알려주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하고, 메뉴판 주고, 기본 스낵 조금 담아서 나가면 돼요. 아, 메뉴판은 이쪽에 있어요.

그날의 첫 손님은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던 인도인 변호사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보관해두었던 위스키를 꺼내며 잔을 준비하는데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님의 옆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녀가 나에게 말한다.



“한, 나도 얼음잔 하나만 줄래요?"



그래, 그때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자신을 포주라고 소개했던 남자가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바에 앉은 손님들이 옆자리에 여자를 한 명씩 요구했을 때부터.




사장은 자신의 가게를 ‘코리안 바’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20년은 지난 한국 가수들의 R&B나 기계음 가득한 아이돌 노래를 틀어두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손님에게 시발놈, 시발년. 미친. 죽어 따위를 가르치며 낄낄대는 곳. 장난이랍시고 사장이나 매니저나 하루에도 열댓 번씩 개새끼야, 를 외치는 곳. 그곳은 ‘코리안 바’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그런 바는 본 적도 없고 일해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코로나로 매출이 줄어들자 계약할 적에는 언급되지도 않았던 유흥업소의 분위기가 가게 곳곳에 피어올랐다. 기어코 직원으로 접객 여성 한 명이 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절망의 최대치를 맛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찾아온 사랑이다. 포주 직원의 집에 같이 사는, 손님 옆에 앉을 여자가 부족할 때 불려 왔던 그 사람. 나는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 말문이 막히는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녀는 올 때마다 열대의 햇살을 가득 안고 들어왔다.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발이 편한 운동화나 쪼리에 핸드백 하나 없이 오른손에 휴대폰만 달랑 들고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사석에서 만나면 어떤 사람일지, 일터 밖에서도 저렇게 눈부시게 웃을지, 어떤 이야기를 할지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몇 개월간 지속된 타지 생활에 친구관계라곤 전무하니 단순히 인간적으로 느끼는 호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얼굴을 보는 날이 늘어갈수록 그 사람 주변만 꽃밭이었다. 모두가 그녀가 웃으면 따라 웃는다. 거지 같은 곳에서 거지같이 일하고 있는 나도 웃는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정말 그뿐이었다.



그녀는 늘 내 옆이 아니라 손님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대화의 값으로 300불을 내겠다는 사람들의 옆에. 나와 눈을 마주칠 때는 얼음이 필요하다던가, 새 술이 필요할 때 정도가 다였는데 고작 그 정도만으로 내 마음 어딘가를 푹푹 적셨다. 옆자리 손님이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을 때 같은 찰나의 순간은 더없이 어색한 스몰톡이 오갔다. 머리를 자르셨네요. 잘 어울려요. 오늘은 피곤해 보여요. 어제 늦게 잤거든요. 뭐 그런 식의 상투적인 대화. 나는 열심히 브레이크를 걸어보려 했다.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선 안된다고. 그건 정말 싫은 일일 거라고. 그녀가 나에게 하는 말투와 눈빛이 옆에 앉은 남자에게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이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둬야 한다고 되뇌면서도 혼자서 질투와 실망을 반복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눈동자가 어쩌면 저렇게 반짝거리지. 왜 사람을 빠져들 것처럼 쳐다보지. 이러니까 옆에 앉고 싶다는 남자가 줄을 서지. 웃는 건 또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왜 날 보고 웃는 거야.



그렇다. 이미 늦은 것이다. 나는 이미 그녀의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었고, 여자들이 근무하는 가게의 분위기가 싫으면서도 그녀가 오는 날을 기다렸고, 그녀 옆에 앉은 남자들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리고 그녀는 곧 내 마음을 눈치챘다. 한 번도 숨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숨겨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녀를 네 번째로 마주 본 날에, 기어코 고백 비슷한 걸 해버리고 말았다.



저는 양성애자인데,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몇 년 사이에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사실 평생에 처음이다)

불편하시면 말해 주세요. 모른 척할 수 있어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서 죄송해요. 제가 더 참아 볼게요. 여기서 편하게 계셨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빨개져 몇 초 동안 눈도 못 마주치는 지경이지만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 혼자 두근거리고 등 뒤에서 손가락을 깨작거리는 이 느낌이.

당신은 양성애자가 아니라고 했다. 동성애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기분 좋게 테킬라를 털어 넣는 당신의 근처를 얼쩡거리는 나에게 자꾸만 별사탕 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덥석 덥석 일하고 있는 나를 잡아서 허리를 감싸 안는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나는 당신을 아주 좋아하는데. 피부가 맞닿으면 전기가 통하는 것 같고, 그 품에 안기면 얼굴에 끼치는 향기를 크게 들이마시게 되는데. 그리고 어김없이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데.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내 등을 끌어안을 때면 꽝꽝 얼어서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데.



나는 양성애자이고, 당신에게 거부할 수 없는 호감을 느끼고 있어요.

당신은 나와 같은 성향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강요도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아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오래 봐요.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마음 편하게 친구로만 보아도 괜찮아요.

그런 거에 익숙하니까. 잘할 수 있으니까. 절대 작업 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나를 볼 때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요. 멀리서라도요. 옆 자리가 아니라 옆 테이블이나, 바 건너편이어도 좋으니까.



이렇게까지 말을 전했는데도 성큼성큼 건너와서 나를 꼭 안는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정한 손길에 나는 사정없이 몸이 굳어버린다. 아래에서 놀란 심장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콩닥콩닥, 콩닥콩닥.

"나는 사실, 십 대 때 여자가 나 좋아한다고 하면 되게 싫었거든요. 근데 한은 정말 귀엽네. 너무 귀여워."

가슴이 찢어졌다 붙었다.

그녀의 번호를 알고 싶다고 천 번을 생각하고 결국 묻지 못했다. 지난 몇 주간 당신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잘 살았건만 이렇게 어쩌다 하루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 만으로 와장창 무너져버렸다. 왜 자꾸 나를 안아, 왜 자꾸 나를 만져.



아, 지금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망한 고백을 하고 번호도 묻지 못한 채 한껏 두근거리기만 했던 날, 근무의 끝물에서 '이번 주 일요일에 같이 바닷가 갈래요?'라고 물었던 그녀의 제안을 우물쭈물하다가 거절해 버렸다. 첫 번째로 수영복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고, 두 번째로 내가 수영복을 입을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물어보면서 내 머리통을 제 앞가슴에 꼭 밀어붙이고 있는 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근래 싱가포르도 역병 환자가 늘어나고 있어 휴일에 밖에 나가지 않은지 오래였다. 아, 그냥 부끄러워. 부끄러워요. 아직 단 둘이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넋 놓고 그 웃음만 쳐다보고 있게 될 거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덥석 이번 주 일요일에 보자고 말해.



"마저 힘내요. 다음에 볼 때는 내 번호 줄게요."

그녀는 이 말을 하고 짓궂게 웃으며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나는 밤새 뒤척였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뉘었다가, 왼쪽으로 뉘었다가. 머릿속에 ‘멍청아, 이 바보 멍청아. 이렇게 오래 생각할 거였으면 지금이라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멍청아. 바보같이 번호도 받지 못해서 연락도 못하고. 넌 대체 잘하는 게 뭐야. 마음의 준비는 무슨 마음의 준비야. 밤새 그 사람 생각으로 잠 못 자는 걸로 이미 끝났어. 너는 망했어. 봐, 지금도 또 후회하고 있잖아.’라는 환청이 뱅뱅 돌았다.

맞아. 난 바보 멍청이야. 몇 년 만에 다른 사람 생각으로 잠을 설치는데 바보처럼 심지어 언니가 먼저 물어봐준 걸 걷어차 버리고.

그 생각은 다음날 출근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바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얼굴. 이쪽으로 팔을 벌리는 몸짓. 바닷가재처럼 시뻘게진 내 얼굴에 박수까지 치며 웃었던 싱그러움까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세 시간을 고민한 끝에, 나는 그녀의 지인(포주)에게서 연락처를 받아냈다. 정말 나 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리고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는 게 실감이 나서. 어이가 없어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00 바텐더 한이에요. 밤새 생각이 나서 00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혹시 불편하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꼭 연락드리고 싶었어요.” 로 시작된 구구절절한 문자에 그녀는 레몬 같은 상큼함으로 답했다. '아, 반가워요.'

답장이 올 때마다 발바닥에 구름이 밟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닷가 일행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빛나는 사람이 혼자 갈 리가 없었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액정 너머에 같은 나라 어딘가에 있을 그녀가 나에게 답신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힘내라는 문자에 정말 힘이 났다. 씩씩하게 일하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 가게에 자주 오는 손님 레오와 그녀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둘이 아주 찰싹 붙어있다. 레오는 모르겠고 그녀의 얼굴은 눈이 부시다.

“정말 아름다워요. 사진 저장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옆에 레오는 잘라버리고요.”

내 바보 같은 물음에 그녀가 웃는다. 해바라기 같은 사진들을 잔뜩 보내줬다. 이번에는 모두 혼자 찍은 사진이다. 윙크하는 동영상까지 날아오는 바람에 일하다가 무릎을 꿇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다 펄떡대네. 큰일 났네. 이거 진짜 큰일이다. 내가 해야 할 건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 밖에 없구나.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행복해지는구나. 당신 정말 아름다워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랑만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참 좋았을 텐데.

부끄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녀로 인해 나는 생전 처음으로 유흥 여성에 대한 스스로의 편견과 싸우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태도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전시된 상품처럼 취급하게 하는 이 사회가 싫었다. 넘쳐나는 몸매 품평과 어린 여자를 보는 시선, 화장을 한 얼굴이 당연한 것인 양 대하는 이 사회가. 유흥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내가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는 한국의 '여성성'의 집합체라고 생각했다. 명품을 좋아하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더 빨리 더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몸매를 드러내며 사내들의 말 상대를 해주는 여자들. 그들의 가치관을 존중하지만 굳이 말 섞고 싶지는 않은 그런 여자들. 여성인권의 앞날에 편견과 방해만 뿌려놓을 것 같은 부류의 여자들. 그들 중 누군가는 모던바에서 스스로를 바텐더라고 불렀을 것이며, 그렇게 클래식 바의 여자 바텐더에게 징그러운 손님이 붙도록 여자를 얕잡아볼 여지를 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한국 중년 남성들에게 여자라는 종족을 언제든 웃어줘야 하는 존재, 희롱할 수 있는 존재, 비위를 맞춰줘야 할 것 같은 존재로 만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을 좋아할 수 없었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 여자들과 직업적인 이름이 유사하다는 것 자체도 털어내고 싶을 정도로, 나는 유흥업 종사자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 여자들이, 나와 만날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녀의 직업이 무엇인지, 하는 일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밤마다 그녀의 꿈을 꾸고 괴로워했다. 생각나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만큼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언니에게 미안해졌다. 언니가 왜. 언니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러는 자신은 뭐가 그렇게 떳떳한가. 그녀는 내가 바뀐 가게의 분위기에서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작이 그녀가 처음 일하러 온 날이었던 것도, 내가 그녀의 옆에 앉아있는 손님들을 어떤 눈으로 보는 지도. 그리고 그녀 외의 다른 아가씨들에게는 얼마나 형식적으로 구는지도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언니를 사랑한다고 따라다녔고, 그래서 언니는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언니는 손님들 옆에 앉아서 허벅지를 붙이고 얘기를 나누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태양처럼 웃고 술에 취하면 여섯 배는 더 사랑스러워진다. 내가 보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손님에게 명품 가방을 선물 받은 것을, 밖에서 더 많은 손님을 만나는 것을, 일이 끝나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그것 역시 사랑처럼, 숨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언니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바에서 입는 유니폼을 벗고 언니를 만나고 싶었다. 손님이 옆에 없는 그 사람의 얼굴이 궁금했다. 정말로 언니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400불이었다. 포주가 이전에 물건 팔듯 말했던 그 소유 여자들의 가격, 몸값. 그녀의 한 시간을 오롯이 사는 데에는 400불이 들었다. 400불. 400불. 400불.



구역질이 났다.



나는 그녀가 매력적이라며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여느 남성 손님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녀의 웃음에 홀려서 어떻게든 한 시간 동안 그 시선을 나에게 묶어놓고 싶다는 발악. 내가 그렇게도 경멸하던, 여성의 시간을 돈으로 사는 남성들의 입장에 이입해버리고 만 것이다. 변명처럼 성구매자의 입장을 합리화하기까지 했다. 토기가 가시지 않았다. 궤변이던 아니던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충격이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이제 경멸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때에 언니의 직업과 언니의 손님들에 대해서 차마 말로는 못할 천박한 상상을 했던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멈추지 못해 밤마다 꿈을 꾸고 황홀하게 일어났던 아침들을 기억한다. 결국 깨달은 것은 내가 무례하고 어리석었다는 것뿐이다.

언니는 나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 어떤 방자한 상상 속에서도 내가 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벌인 망상에서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아니었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이면들, 관점들. 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도록 만든 내가 싫다. 내 잘못이다.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언니의 시간을 사고 싶다는 생각에 매달렸던 밤은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때때로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삐딱한 각도로 여성을 보았을 것이다. 나 자신이 기준이라고 믿으면서.



언니를 사랑한다. 보면 볼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나는 내가 언니를 바라만 봐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코로나로 싱가포르 전체에 봉쇄령이 내리고 가게가 한시적으로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일주일도 안 남기고 한국행 티켓을 끊었을 때에도 언니의 삶에서 미련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기를. 귀국 전에 송별회를 해주겠다던 레오로부터 언니와 동거 중이고 진지하게 교제 중이라는 소식을 들을 때에도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하지만 아니었다. 너무 당연하게도, 나는 까마득한 상실감을 맛보고 말았다.



레오. 가무잡잡한 피부에 감자처럼 생긴, 쳐진 눈꼬리를 한 사람 좋은 레오.

레오는 지저분한 가게에서 몇 안 되는 좋은 손님이었다. 한량 같은 일행들 중에서도 순박하고 다정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였다. 시시콜콜 내가 하는 언니 자랑을 들어주며 얼른 사랑을 고백하라고 등을 떠밀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종종 언니가 레오의 옆에 앉기도 했지만, 나는 300불짜리 광경이라고 자위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레오는 10년을 사귄 여자 친구와 한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들끼리도 다 아는 건실한 교제 중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속으로 생각도 했다. 어차피 사람 좋아 보여도 레오 역시 여자를 새롱거리는데 익숙한 사내놈이라고. 언니를 옆에 앉히고 놀고 있을 동안 집에서 모르고 기다릴 여자 친구가 가엾다고. 나라면 언니를, 돈이랑은 상관없이, 그냥 행복하게. 온전히 아껴줄 수 있을 거라고.



레오는 열아홉 영국 유학시절부터 10년을 만났던 일본인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언니와 만나기 위해서. 부모님 집에서 쫓겨나 호텔방을 얻어도 레오는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모든 과거를 정리하고 그녀와 새 연애를 시작한 거였다. 아, 진짜 비겁하네.

레오의 문자를 보고서는 불쾌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어중간한 기분이었다. 굳이 꼽는다면 서글픔이었을 것이다. 느슨하게 잡은 줄을 탁 놓아버리는 것처럼 미지근하고 기운 빠지는. 나는 체념이 빠르다. 동성애자도 양성애자도 아니라고 말한 사람에게 혼자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을 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언니에게도 레오에게도 떳떳할 수 없었다. 레오의 문자에서는 다분히 견제가 엿보였다. 내가 언니를 사랑하는 것에, 언니가 어영부영 나를 받아주는 것에, 우리가 단 둘이 만나는 시간을 갖는 것에. 솔직히 우스운 일이었다. 너는 남자고, 주말마다 3000불이 넘는 돈을 유흥을 곁들인 술집에서 소비할 재력이 있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는데 어째서 보잘것없는 나를 경계하는지. 레오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를 끝으로 나는 더 이상 언니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불순한 감정을 가진 채로 모든 걸 다 아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약속 당일날, 나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한 집에서 언니가 좋아한다던 볶음국수를 포장해갔다. 언니가 마중을 나왔다. 오픈숄더 형태의 검은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다. 황홀한 자태에 벅차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제 마음껏 볼 수도 없다니.

언니는 내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스식 계단을 훌훌 오르고 엘리베이터 층수를 누를 때마다 언니의 날개뼈에 있는 나비 날개가 일렁거렸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목덜미, 목덜미에 가까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보기만 해도 바닐라 향기와 함께 진한 햇살 내음이 느껴진다고.

그날 나는 폭격 같은 선물 보따리에 둘러싸였다. 레오가 주는, 언니가 주는, 나를 만났던 손님들이 내게 보내는 사랑스러운 성의들에. 레오는 명품 브랜드의 만년필을 주었고 언니에게는 가죽 다이어리 커버와 곰인형을 받았다. 외국인 노동자라서 먹어보지 못했던 호화로운 싱가포르 음식들도 잔뜩 얻어먹고 귀한 술도 여러 병 땄다. 다 같이 앉은 테이블에서 나는 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레오를 흘겨보는 장난을 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언니의 뺨에 뽀뽀를 했다. 식도 안쪽이 근질거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진심으로 언니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눈물이 날 만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구나. 언니는 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빠져 죽을 만큼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레오는, 좋은 사람이니까.

밤늦게까지 먹고 마시는데 언니는 중간에 춥다고 두꺼운 후드티를 하나 껴입었다. 술이 들어가 한층 애교스러운 목소리, 멈추지 않는 미소. 나와 레오는 점점 정신이 맑아졌다. 우리는 스무고개 하듯 그녀의 예쁜 점을 백가지는 말했다.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천 가지 이유를 가지고 투닥거렸다. 그리고 같이 웃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안도감과 질투심이 동시에 든다.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아 보이는 레오에게.



밤이 늦어 집에 갈 채비를 했다.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레오의 앞을 언니가 막아선다. 처음 들어올 때처럼 나가는 길도 언니의 뒤를 따라갔다. 언제 후드를 벗었는지 언니의 등에 다시 나비 날개가 달려있었다. 별로 취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알딸딸한 시야로 언니의 뺨이 유독 붉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베이터 16층. 문이 닫힌다. 우리는 둘 다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15층을 지날 때, 언니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온 하늘의 별자리가 다 담겨있는 저 눈동자 때문에 사랑에 빠졌지.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좋아하게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차피 같은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12층을 지날 때, 언니가 두 발짝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등 뒤에 차가운 금속의 온도가 느껴졌다. 10층을 지날 때, 언니가 마스크를 벗었다. 흠잡을 데 없는 입술. 바닐라 향기가 코앞이었다. 나는 내 마스크를 꼭 잡고 있었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바보같이 ‘제가 양치를.. 아까 칠리크랩 먹었는데.. 가글도 안 해서.’ 이런 말이나 웅얼거리고 있는 나. 머리는 뻥 터지기 직전이고 정수리까지 열이 40도는 올랐다. 10층을 지날 때, 언니가 내 마스크를 내렸다. 역병의 시대에, 방역의 용도로 하관을 덮어주는 꼴의 천조각이 이렇게나 야할 수가 있다니. 붉은 등이 켜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언니는 나에게 키스를 했다. 불꽃이 터지고, 종이 울린다. 거대한 트럭이 심장의 사방을 치고 지나간다. 1층에 도착해 내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때까지, 우리는 키스했다.





언니는 교통사고처럼 내 인생에 들어왔고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녀가 가끔 보내주는 사진 속 눈웃음에 주책맞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 늘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런 것이 우주를 후려치는 사랑이라는 것을.



레오, 잘 지내고 있니?

널 죽이고 싶다는 내 말에 넌 많이 웃었지.



레오, 잘 지내고 있니?

그녀가 지난겨울 한국에 왔을 때, 우리는 또 키스를 했어. 너와 영상통화를 했던 그 포장마차 뒤에서.



레오, 잘 지내고 있니?

너 때문에 나는 난생처음 애인이 있는 사람과 키스를 했어. 죄책감도 후회도 없는 키스를 했어. 너도 그녀를 사랑한다면 알 수밖에 없을 거야. 그녀를 거부할 방법은 없다는 걸.



언니가 나의 야망이다. 삐뚤고 글러먹어도, 언젠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행복한 날이 올 수 있다면.





레오, 널 죽이고 싶다는 나의 말에 네가 지금도 웃어줄지 나는 너무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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