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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범 있는 쪽으로 절 올립니다

두 번 하고 반, 제사상 이로세

by 해인


2025년 1월 1일, 오전 7시의 거제도


해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어제의 해가 불덩어리는 불덩어리이되 타는 것은 정지한 불덩어리였는데, 아침의 일렁거리는 불길을 온몸에 달고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덩어리였다. 그래서 어제의 해는 정교하게 동그랗고 그 색깔도 붉은 기 섞인 황금빛이었는데, 지금의 해는 정교함이 없는 동그라미이면서 그 색깔은 눈이 시린 순 황금빛이었다. 어제의 해는 마주 바라볼 수 있었는데 오늘의 해를 마주 바라볼 수 없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하늘을 물들인 붉은 기운에서 넘치던 생명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손승호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9>


*

싱가폴에서도, 부산에서도 해안가에 늘어선 크레인을 볼 때마다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뇌는 없고 몸집은 거대한 거인을 보는 느낌, 기이하게 움직이는 로봇을 보는 느낌. 그것들이 인간에 의해 조종되어 인간이 필요한 것을 담는 물체를 만든다. 거제에서도 그렇다. 크레인은 늘 이곳에 있었는데, 농성장에 와서야 알았다. 여기에도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새해 해돋이는 거제에서 고제통영고성 조선하청노동자분들과 함께했다. 일출과 일몰은 거울처럼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섬 같은 배가 뚝 뚝 떠있는 길을 걸었다. 2024년 아빠와 연포에서 보았던 해돋이는 침침한 구름에 잠겨 테두리도 보이지 않았는데, 2025년의 해는 화살처럼 쨍하고 강렬한 빛살에 둘러싸여 떠올랐다. 등 뒤에서는 금속노조원 동지들이 투쟁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왼쪽 옆에는 무지개 깃발이 흔들리고 있다. 남색 조끼에 노란 리본을 달고 모자에는 차별금지법 찬성 핀을 주렁주렁 단 중년의 남성들과 함께 시작하는 새해. 기운이 좋다. 인생에서 맞았던 그 어떤 태양보다 찬란하다.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덩어리, 정교함이 없는 동그라미. 마주 볼 수도 없는 황금빛의 생명력. 밝아오는 것들을 비통 속에서 마주해야 하는 어딘가의 유족들에게 셀 수 없는 애도를 보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감히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빛이 침투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슬픔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투쟁은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의기소침하고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노동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젠더노소 상관없이 율동을 한다. 이들을 보며 책 태백산맥과 이현상 평전, 빨치산의 딸에서 종종 보았던 사회주의자들의 오락회를 떠올렸다. 힘겨운 투쟁에서도 춤과 노래, 문화와 예술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던 운동가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눈물이 펑펑 솟아오른다.


오늘로 43일 단식을 하고 있는 강인석 부지회장 옆에서 떡국을 먹는데 목에 매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야윈 모습에 멀리서도 마음이 안 좋았는데 막상 직접 뵈니 다행스러울 만큼 건강하고 담담한 분이었다. 스무 살 때 처음 단식을 했는데 인생에 단식을 한 것만 150일이 넘을 거라던, 단식복이 있는 것 같다고 허허 웃던 부지회장님의 모습을 기억한다. 동지들이 있어 이번 단식은 몸도 마음도 편하다는 부지회장을 천 마디 기도를 담은 눈으로 바라보며 털모자를 씌워주던 조합원의 몸가짐도. 산도 눈도 겨울도 총알도 무너뜨리지 못할 어떤 연대를 기억한다. 전사들은 노동현장 곳곳에 있다.


사회주의는 뭘까.

문화제 뒤풀이 토론회에서 지회장은 민주주의가 환상이라고 얘기했다.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환상 속에, 민주주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환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친위쿠데타를 주도한 내란범이 민주주의를 위협에서 지켜내고자 국민에게 발포명령을 하는 세상이다. 노동자의 인권을, 장애인의 인권을, 주목받지 못하는 성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다르기 때문이다. 깊은 좌절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우리는 투쟁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태어나고 자라날 젊은 생명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천지에 햇살이 비추어 뒤돌아보니 투쟁을 외치는 동지들이 있었다. 어린 대학생들이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며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다. 두 손을 모아 묵념하고 새해를 응원하는 덕담을 하고 사람 같지 않은 것들에게 제사 절을 했다. 두 번 하고 반, 산 자 취급도 하기 싫으니 귀신한테 하는 절이라도 받아라.


해가 찬란하다 하였더니 부지회장님이 핼쑥한 뺨으로 해주셨던 말을 가슴에 담고 간다.


“거제에서 좋은 기운을 가득 받고 가세요.”


아무렴요.

반짝이는 것을 다루는 분들 중에서도 제일 강하게 반짝거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해서 오늘 아침해가 그렇게 밝고 쨍하고 잊지 못하게 빛났나 보다.


여기까지 왔으니 무안 공항에 들러 추모를 하고 가야겠다. 흔들림 없는 햇살을 타고 평온한 곳까지 올라가시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한없이 죄송하고 면목없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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