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 다이어리

바텐더가 술 좀 안마실 수도 있지

by 해인

좋은 바, 맛있는 칵테일, 우아한 다과.



팔이 바깥으로 뻗지 않는 까닭은 술잔을 잡기에 편리하려고 그런다네.

<마장전> 박지원,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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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술이 달다.

쉬는 날에도 퇴근 후에도 혼자서 입맛을 다시다가 먹다 남은 와인을 들이붓거나 위스키 하이볼을 만들어먹기 일쑤다. 술은 뭘까.

나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술이 아니라 분위기에 취한다고, 술을 먹고 싶게 만드는 상황이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입에 대지 않는다. 혼자 집에 있을 때는 마찬가지다. 바텐더를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지겹게 위스키와 칵테일 시음을 하고 손님들과 술잔을 부딪히니 일터 밖에서는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 년에 도수 3도짜리 음료수 같은 맥주를 세잔 정도 사서 마시면 웬일이야, 하는 정도.

요즘은 자꾸만 술에 손이 간다. 어릴 땐 맛있는지도 몰랐던 맥주가 이제는 캔에 있는 라벨만 보아도 시원해 죽겠다. 느긋하게 책과 글에 대한 담론을 나눌 때는 와인이 좋고 더 빨리 취하고 싶을 땐 위스키가 제격이다. 분명 나는 혼자서 이렇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침에 와인병이며 맥주병들이 쨍그랑거리는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갈 때마다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이 생각난다. 알콜중독자의 에세이, 술을 많이 구매하고 봉투를 가득 채운 빈 병을 버리는 것이 부끄러워 미니어처 술을 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쓰레기를 버렸다던 캐롤라인 냅. 나도 그 초기인 걸까. 이러다 알콜중독자가 되는 게 아닐까.​


당연히 아니다.

나는 아직 괜찮다. 근래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그래 봤자 하루에 와인 한 병, 혹은 맥주 세병. 어느 날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하이볼이 전부다. 이 정도 도수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지 않는다. 다음날에 숙취로 고생하며 출근하지도 않는다. 글을 쓰면서 마른 목을 축일, 기왕이면 물이나 소다수보다는 알콜기운 낭낭한 음료를 원하는 것 뿐. 술이 없으면 아쉬운 밤이라는 건, 술을 즐길 만큼의 여유와 운치가 있다는 뜻이겠거니 스스로 위안을 하고 있다. 이 정도 한 잔도 걸치지 못하면 인생이 너무 각박하잖아.

전에 일할 땐 솔직히 과음을 했다. 안심되는 사람들과 좋은 손님들 앞에서, 한껏 기분이 좋아져 나사의 조임이 아슬아슬해질 때까지 마시면서 일했다. 삐빅, 이 이상은 그만. 안돼, 이제 그만 마셔. 마감시간 즈음되면 머릿속에서 이런 경고음이 들리는 일이 다반사일 정도로, 휘청휘청 헤실헤실. 그만큼 행복한 곳이었다. 웃음과 강락이 넘쳐나는 바.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처음부터 설명하기엔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니 그저 내가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만 말한다. 이 가게에서 나는 손님의 술을 받지도, 취하지도, 건배를 하지도 않는다. 나는 당신들의 오락을 멀리서 지켜만 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퇴근 후의 음주가 잦아진 것 같다. 싱가포르에 머물고 있는 이 삼 개월 동안 꽤 많은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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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글에는 익살이 있다. 당연스러운 말 사이사이에 교훈처럼 익살이 피어난다. 범이 아무리 사람을 잡아먹어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만 못하겠지. 술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려면 팔이 안으로 굽어야 편한 법이지. 그가 만들어낸 광문과 허생은 얼마나 허구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인물들인가. 그의 글 자체가 한잔의 술을 만드는 효모다. 달큼함과 누른 향을 뽐내는, 200년 뒤에도 돌고도는 세상살이.​


그가 글을 쓰고 난 이후로 몇 세기가 지났음에도 사람은 여전히 지구 상 그 어떤 생물보다 사람을 많이 잡아먹고, 팔은 삽백육십도 회전하는 대신 안으로만 굽는다. 그리고 광문과 허생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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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글을 보니 술 생각이 났고, 술 얘기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만 아쉽게도 나는 지금 술을 먹고 있지 않다.

30분 건강한 운동을 하고, 자기 전에 야식도 먹지 않고 근면한 생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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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일 즘 삭발하고 싶다는 글을 쓰며 또 꼴꼴 와인을 들이켜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술을 참았다.

참은 것도 아니지. 그렇게 마시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안으로 굽는 내 팔은 오늘 술잔을 쥐기 위한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연암 박지원의 <마장전> 문장 단상을 쓰는 용도로.

나는 알콜중독자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러기에 내 오른손과 오른팔뚝은 글 쓰는 것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어쩌면 술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아니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내 글을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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