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는 또 불행해질까

by 해인
장 레옹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1882



그레트헨

(전략)

하지만 - 나를 이리로 몰아온 그 모든 것은,

아아! 너무도 달콤했고! 너무도 사랑스러웠어!


요한 볼프강 괴테, <파우스트> 중



*


멍청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 버렸다.


웃음이 너무 예쁜 사람이다. 목소리에서 애플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묻어 나온다.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머리칼과 어깻죽지에서 자신과 꼭 닮은 좋은 향기가 난다. 제기랄, 이건 절대로 좋은 선택이 아닌데.


건강하고 혈색 좋은 피부톤이라 단정한 가을색의 니트가 어울린다. 늘 낙낙한 품으로 입고 다녀 한층 사랑스럽다. 무심코 몸을 기울이게 되는 따스함으로 대화한다. 크게 웃을 때 사방에 꽃이 피는 것 같다. 표정에서 소리에서 모든 것에 빛이 퍼져 나온다.


나는 불행해질까. 슬픈 외사랑을 시작한 걸까. 고등학교 때처럼 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내 무릎에 누운 당신의 머리칼을 넘기며 다른 좋은 남성과 짝을 이루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될까. 이 마음을 단 한 톨도 숨기지 못하고.


원래 짝사랑을 좋아한다. 몰래 한답시고 해보려고 하는데 홀라당 티가 나서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꼭 이루어지지 않을 사람만 고르는 재주가 생겼다. 씁쓸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미적지근하게 보내줄 수 있게 낯짝의 두께도 두꺼워졌다.


언제부터인가 내 정체성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사랑을 숨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나는 때로는 남성이 좋고, 때로는 여성이 좋다. 남성에게는 사랑받지만 여성에게는 사랑을 바친다. 그래서 나는 여성의 앞에서 더 작아지고, 수줍음이 많아지고, 부끄럼을 탄다. 이런 내가 사랑에 빠져버리다니. 긴긴 세월을 지나서 또 햇살처럼 웃는 사람을 좋아해 버리다니. 단발이 이렇게 예쁠 수가 없는 사람을,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아직 ‘사랑’이라 부르기엔 새파란 감정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만으로 심장이 콩닥콩닥 뛸 때 나는 아찔해진다. 불길한 예감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뱉어버린다.


“저는 양성애자인데,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몇 년 사이에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


“불편하시면 말해 주세요. 모른 척할 수 있어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서 죄송스럽네요. 제가 더 참아 볼게요. 여기 편하게 계셔 주셨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빨개져 몇 초 동안 눈도 못 마주치는 지경이지만 나는 이 기분이 좋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 혼자 두근거리고 등 뒤에서 손가락을 깨작거리는 이 느낌이.

당신은 양성애자가 아니라고 했다. 동성애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기분 좋게 술 마시는 당신의 근처를 얼쩡거리는 나에게 자꾸만 별사탕 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덥석 덥석 일하고 있는 나를 잡아서 허리를 감싸 안는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나는 당신을 아주 좋아하는데. 피부가 맞닿으면 전기가 통하는 것 같고, 그 품에 안기면 얼굴에 끼치는 향기를 크게 들이마시게 되는데. 그리고 어김없이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해 버리고 마는데.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내 등을 끌어안을 때면 꽝꽝 얼어서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데.


나는 양성애자이고, 당신에게 거부할 수 없는 호감을 느끼고 있어요.

당신은 나와 같은 성향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강요도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아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오래 봐요.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마음 편하게 친구로만 보아도 괜찮아요.

그런 거에 익숙하니까. 잘할 수 있으니까. 절대 작업 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나를 볼 때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요. 멀리 서라도요. 옆 자리가 아니라 옆 테이블이나, 바 건너편이어도 좋으니까.


이렇게까지 말을 전했는데도 성큼성큼 건너와서 나를 꼬옥 안는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정한 손길에 나는 사정없이 몸이 굳어버린다. 아래에서 놀란 심장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콩닥콩닥, 콩닥콩닥.


"나는 사실, 십 대 때 여자가 나 좋아한다고 하면 되게 싫었거든요. 근데 해인 씨는 정말 귀엽네. 너무 귀여워."


가슴이 찢어졌다 붙었다.


다음번에 보면 번호를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를 품에 안은 당신이 이번 일요일에 바닷가에 가자고 한 것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직 무서워서.


남은 팔 개월 동안 당신을 사랑할 자신은 있는데, 팔 개월이 지나고 당신을 놓아줄 자신은 없어서.

웃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입 맞추고 싶고 키스가 하고 싶어 질까 두려워서.

지난 한 달간 나는 당신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잘 살았건만 이렇게 어쩌다 하루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 만으로 와장창 무너진다. 왜 자꾸 나를 안아, 왜 자꾸 나를 만져.


아, 지금도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집은 잘 들어갔는지 묻고 싶다.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비 오는 날에 무슨 음악을 듣는지. 싱가포르는 왜 오게 되었는지.


좋지 않은 선택이다.

실컷 울고 비참해 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떡하니. 나를 이리고 몰아온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웃음은, 말투는, 목소리는, 손짓은, 너무 달콤하고

너무도 사랑스러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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