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오늘까지만

멍청이가 사랑에 빠진 이야기

by 해인



미할리 폰 지치, <Romantic encounter>, 1864



하나의 사랑이 잊혀지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


친구들이 연애 문제로 외로워할 때, 나는 늘 같은 말을 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조급해하면 절대 안 와. 모든 걸 포기하고 넝마처럼 살고 있을 때 날개만 없는 천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단 말이야. 그때를 기다려야 해.”


세상에.

딱 하루만 더, 주접스럽고 아무도 관심 없을 사랑이야기를 더 써야겠다. 딱 하루만 더.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다. 마치 첫 연애를 하던 열아홉 살로 돌아간 것 같다.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좋아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사랑할 만한 사람이 하늘에서 내 앞으로 떨어졌다는 게.


어제 근무의 끝물에서 '이번 주 일요일에 바닷가 같이 갈래요?' 했던 그녀의 제안을 우물쭈물하다가 거절해 버렸다. 첫 번째로 수영복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고, 두 번째로 내가 수영복을 입을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내 머리통을 제 앞가슴에 밀어붙이고 있는 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리가. 그리고 근래 싱가포르도 코비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어 휴일에 밖에 나가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아, 그냥 부끄러워. 부끄러워요. 아직 단 둘이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넋 놓고 그 웃음만 쳐다보고 있게 될 거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덥석 이번 주 일요일에 보자고 말해.


"마저 힘내요. 다음에 볼 때는 내 번호 줄게요."

그녀는 이 말을 하고 짓궂게 웃으며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밤새 뒤척였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뉘였다가, 왼쪽으로 뉘었다가. 머릿속에 ‘멍청아, 이 바보 멍청아. 이렇게 오래 생각할 거였으면 지금이라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멍청아. 바보같이 번호도 안물어봐서 연락도 못하고. 넌 대체 잘 하는 게 뭐야. 마음의 준비는 무슨 마음의 준비야. 밤새 그 사람 생각으로 잠 못 자는 걸로 이미 끝났어. 너는 망했어. 봐, 지금도 또 후회하고 있잖아.’라는 환청이 뱅뱅 돌았다.

맞아. 난 바보 멍청이야. 몇 년 만에 다른 사람 생각으로 잠을 설치는데 바보처럼 심지어 먼저 물어봐준 걸 걷어차 버리고.


그 생각은 오늘 아침부터 출근하고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어젯밤 내 앞에 앉아있던 얼굴. 이쪽으로 팔을 벌리는 몸짓. 바닷가재처럼 시뻘게진 내 얼굴에 박수까지 치며 웃었던 싱그러움까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세 시간을 고민한 끝에, 나는 그녀의 지인에게서 연락처를 받아냈다. 정말 나 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리고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는 게 실감이 나서. 어이가 없어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00 바텐더 00이에요. 밤새 생각이 나서 00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혹시 불편하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꼭 연락드리고 싶었어요.” 로 시작된 구구절절한 문자에 그녀는 레몬 같은 상큼함으로 답했다. '아, 반가워요.'

답장이 올 때마다 발바닥에 날개가 돋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닷가 일행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빛나는 사람이 혼자 갈 리가 없었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액정 너머에 같은 나라 어딘가에 있을 그녀가 나에게 답신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힘내라는 문자에 정말 힘이 났다. 씩씩하게 일하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 가게에 자주 오는 친한 손님과 그녀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둘이 아주 찰싹 붙어있다. 손님은 모르겠고 그녀의 얼굴은 눈이 부시다.

“정말 아름다워요. 사진 저장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옆에 00은 잘라버리고요.”

내 바보 같은 물음에 그녀가 웃는다. 해바라기 같은 사진들을 잔뜩 보내줬다. 모두 혼자 찍은 사진이다. 윙크하는 동영상까지 날아오는 바람에 일하다가 무릎을 꿇고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다 펄떡대네. 큰일 났네. 이거 진짜 큰일이다. 내가 해야 할 건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 밖에 없구나.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행복해지는구나. 당신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때도 열대의 햇살을 가득 안고 들어왔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줄은 전혀 몰랐는데. 꿈도 꾸지 않았는데.

두 번째 만남도 기억한다. 만나보고 싶다, 사람 대 사람으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 주변만 온통 꽃이 핀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주둥이 간수를 못했다. 무드도 없고 로맨틱하지도 않게 철없어 보이는 호감을 내비치고 말았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싫어할 텐데.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양성애자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네 번째 만났을 때 나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지난번 만남의 기억 때문에 실례라도 하게 될까 조심조심 겉돌으려는 나를 자꾸만 안으로 끌어당겨서. 감출 수도 없을 만큼의 거리까지 다가와서. 그녀가 나를 안을 때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멍청하게 사랑할 준비가 됐다는 얘기다.


우연이었을까. 이 모든 것은,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무안한 상황으로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내가 말하던 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거였을까.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은 이미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느낌, 아무것도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것을 주어버린 느낌.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우연보다는 운명이 마음에 들지만 내 운명에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사랑할 필요가 없으니까. 사랑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을 아주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매번 두근거리고, 빨개진 얼굴을 가리면서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오늘 종일 당신과 나누었던 짧은 연락을 돌려본다. 당신이 보내준 황홀한 미소도 다시 본다. 심장이 또 쿵쿵 뛴다.


딱 오늘까지 만이다. 내일은 정말 다른 이야기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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