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군인은 아니지만 군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군생활도 십수 년 하기는 했지만요.
군대에서 이른바 먹은 짬밥이 벌써 이십 년이 되어가니 군대에서 보낸 시간이 밖에서 보낸 시간보다 많아지기 시작하는 때 같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군대는 뭐랄까 관료주의와 집단주의의 경계 그 어딘가에 있는 이상한 문화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상급자가 가진 절대적인 권한과, 그 권한이 시행되는 방법이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지휘관이 관심이 있으니.. 지휘관이 지시하셨으니.. 아무래도 상급자에게 충성하고 복종하도록 조직 시스템이 구성되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당연히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급자의 명령은 절대복종해야 맞습니다. 암요. 그런데 이런 조직에서 가끔 엉뚱한 방향으로 충성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우리 부서장이 그런 스타일이지요.
전반기 우리 부대는 커다란 사업이 하나 있습니다. 한 해 농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 있게 준비를 해야 하는 사업이고, 연초부터 미리미리 준비를 하라는 지휘관 지침이 있었습니다. 점검표를 보고, 다른 부대는 어떻게 준비했는지, 또 어떠한 평가를 받고 어떤 점이 미흡했는지 각 기능별로 실무자 별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시험으로 치면 시험 범위가 나와 있으니 예상문제를 추려내고 잘 풀 수 있게 연습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훌륭한 부서장은 예상문제를 푸는 방법은 관심 없고 예상문제 글자 크기는 적절한지, 색깔은 튀지 않는 검은색으로만 했는지, 두꺼운 볼드체 글씨는 네모 뒤에만 썼는지..
보아서 아름답게.
네. 본인이 지휘관에게 보고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보아서 아름답게"작성된 문서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내용도 아니고 준비 방법도 아닌 예쁜 보고서.(그런 것이 잘 준비된 보고서라고 합니다.)
바쁜 와중에 줄 간격과 색깔, 쉼표 위치까지 수정한 새로운 쓰레기를 만들고 퇴근했습니다. 정작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은 1도 관심 없는 문서를요. 올 한 해는 호시우보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연초부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배운 것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