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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Mar 22. 2020

우리가 너랑 같이 있어

스페인 격리 일지



스페인의 코로나 바이러스 누적 확진자 수는 2만 5천 명을 찍었다. 마드리드는  한국의 확진자 수를 넘어섰다. 아무래도, 2주 휴교가 끝나고  4월의 부활절 연휴가 지나도, 바로 학교로 돌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지막으로 장 본 후로부터 삼일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활동량이 줄어도 하루 세 끼 꼬박 챙겨 먹고, 원래 식료품을 쟁여놓지 않는 데다가 손까지 작은 편이라, 내 딴에는 평소보다 많이 샀는데도, 며칠 지나니 냉장고가 텅 비었다.


트롤리를 끌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마켓인 Mercadona로 갔다. 3일 전만 해도 자칫하다가는 장 보다 감염되겠다 싶을 만큼 붐비더니, 오늘은 적정 인원만 들어갈 수 있게 입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문 앞에선 사람들이 일 미터 간격을 유지한 채 길게 줄을 서 있었다.


20분쯤 기다려 내 차례가 왔다. 마스크를 낀 직원은 들어가자마자 비치된 비닐장갑을 끼고, 소독제와 휴지로  카트 손잡이를 닦고 사용하라며 안내해 주었다. 여전히 사람이 많았지만 코로나 이전 같은 분위기였다. 80퍼센트 이상이 마스크를 끼고 손에 장갑을 낀 모습만 달라졌을 뿐.  


지난번에는 쌀과 파스타가 완전히 동나 있더니 오늘은 물량이 넉넉히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휴지는 여전히 없다. 며칠은 장 보러 나오지 않을 심산으로 트롤리를 가득 채운 다음, 천천히 하늘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짜증은 나도 대체로 잘 지냈는데, 어제는 생리가 시작되서인지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SNS에 봄꽃 사진이 연달아 올라오는 걸 보니, 조화가 꽂혀 있는 우리집 화분에도 봄꽃을 꽂아 주고 싶은데,  꽃을 살 수 있는 곳도 없고, 사러 가지도 못 한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부모님은 유럽 각국에서 한국인들이 귀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걱정을 내비치셨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으로 수업을 할 수 있는 거면 한국으로 들어왔으면 하는 눈치셨다. 하지만 방학이 아니라 엄연히 수업을 이어가고 있는 학기 중이고, 만약 가능하대도 이제는 어딜 가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돌아가는 건 뭐 쉬운가. 집에서 말라가 공항까지, 말라가 공항에서  마드리드 혹은 다른 경유 도시까지, 그리고  인천 공항까지 가는 길에 바이러스가 옮아도 몇 번은 더 옮을 것 같다.(내가 감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퍼뜨릴 수도 있고) 입국하면 유럽 장기 체류자라고 격리 검사를 받아야 하지. 격리가 끝나면? 서울에 집을 빼고 왔기 때문에 대구 부모님 댁으로 가거나 서울의 친구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한다. 신세 지는 생활이 편하지도 않을 것이며, 스페인처럼  외출 금지는 아니어도 바이러스가 종식된 게 아니니, 막 돌아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유럽에서 왔다고 받는 눈총은 덤. 아, 봄꽃은 살 수 있겠네.



여기 있어도 저기 있어도 경계인임이 마찬가지라면. 내 공간 있고 내 직장 있는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 지금은.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 기타를 꺼내서 몇 줄 튕겨보다가, TV를 켜 뉴스를 보다가, 소파에 기대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메시지가 하나 왔다. whatsapp 단체 채팅방 초대 메시지였다. 우리 학교의 아우렐리아 선생님이 전공 선생님 그룹 채팅방을 만든 거다. 선생님은 제일 먼저 내 안부부터 물었다. 집에서 잘 있다 했더니 걱정했다며 다행이랬다. 그리고 덧붙였다.



"알지? 우리가 너랑 같이 있어."



지난 학기 그라나다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환 교수로 온 아우렐리아 선생님은 마주칠 때마다 커다란 포옹과 함께, 뭐 필요한 건 없는지 문제는 없는지 알뜰히 나를 살펴 주셨다. 아무리 스페인 사람이라지만, 당신도 나처럼 이 학교가 처음인데.



한 시간 뒤에는 집주인 몬세한테서 연락이 왔다. 괜찮은지, 무사한지 물었다. 내가 말라가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이라며. 괜찮다고, 고맙다고 했더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며 평소처럼 스윗한 beso(키스)를 보내주었다.


다른 동료 한 명은 다음 주부터 스카이프로 언어 교환을 하자며, 그렇게라고 얼굴을 보고 지내자 했고, 또 다른 동료는 온라인으로 장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알려주었다.


그동안, 틈 날 때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상황을 방치한 스페인 정부, 경각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스페인 사람들, 자기들은 경각심도 없으면서 동양인을 바이러스 취급하던 유럽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욕했다. 오늘은 내가 그렇게 욕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이렇게 다정한 마음을 건네주었다.


코스타리카도 그랬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코스타리카라는 나라가 결코 지내기 쉬운 환경은 아닌데, 특별히 나쁜 일, 나쁜 기억 없이, 따뜻한 그리움으로 그곳을 추억할 수 있는 건, 이방인이었던 나를 알뜰 살뜰 긍휼히(?) 여겨주었던 티코(코스타리카 사람들을 일컫는 말)들 덕분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나. 같은 상황에서 밖에서 온 사람들을 잘 챙겼던가.


모두가 힘든 상황이라면 나보다 주변을 먼저 살피고, 그 상황이 조금 더 힘들 사람들부터 챙기는 것, 늘 생각은 하지만 쉽지 않다.


지금까지 받고 살았던 마음을 다 베풀고 살려면 건강허게 오래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오늘은 나부터 잘 돌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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