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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Aug 22. 2020

스페인어 수업, 말뺏기 전쟁



스페인어 학원에서 3,4교시의 회화 수업은 매일 한 명의 발표자가 직접 정한 주제에 대한 짧은 발표를 한 후 모두에게 질문 거리를 던지면 거기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플라스틱 문제, 기후 변화, SNS 중독 같은 진지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고, 유년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또는 가장 싫어했던 소리, 미신, 자주 듣는 짜증 나는 질문 등 좀 더 가벼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보통 이 시간은 영국에서 온 열일곱 살 소피가 독점하다시피 한다. 어떤 주제가 나와도 자기 상황에 적용시키며 신나서 말한다. 문제는 너무 많이, 오래 말한다는 건데 선생님은 딱히 제제하지 않는다. 


대개 소피의 이야기에 독일인 자넷이 추임새를 넣는데 자넷이 입을 열면 주제가 안드로메다로 가 버린다. 예를 들면 런던 지하철에 사는 유령 이야기가 사후 세계 존재 여부와 삶의 의미로 가 버리는 것이다. 


선생님들은 소피가 혼자 길게 이야기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럼 지루하게 듣고만 있는 중국 학생 알폰소와 다미안(중국 이름은 모름)은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하고 시키면 잘만 말하는데 말수가 적은 독일인 카일은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직업병이 도져서 초조해진다. 궤도를 이탈한 주제를 돌려오고 싶고, 대화를 독점하고 있는 학생의 말을 자연스럽게 끊고 싶고, 한 마디도 하지 않은 학생이 눈에 밟히고, 질문을 던져서 발언 기회를 주고 싶어지는 이런 선생님 병...


그렇게 반 분위기를 신경 쓰고 있다가 퍼뜩, 나 지금 뭐 하니? 나 선생 아니거든. 학생이거든! 하는 생각이 들며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들어가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들어온 선생님 호르헤는 회화 수업에 적절하지 않은 선생님이다. 말도 너무 빠르고 자기 말이 너무 많다. 아니, 당신은 스페인어 연습할 필요 없잖아요.... 주변에 있는 학생의 존재는 잊은 듯 자기 의견 말하기 바쁘다. 그것도 너무 빨라서 틈을 뚫기도 쉽지 않다. 두 시간을 주제에 맞는 새로운 어휘나 표현 하나 알려주는 것 없이, 다리를 덜덜 떨며 수다 떨고 가는 게 끝.


첫날은 이런 분위기가 낯설어 회화 시간에 어버버하다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억울해졌다. 선생님이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내 발언권은 내가 지켜야겠어. 말 안 하면 내 손해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피가 너무 길게 말하면 추임새를 넣는 명목으로 잘라버리고, 어쩌다 순차적으로 질문이 돌아가면 최대한 길게 말한다. 내가 짧게 말한다고 선생님이 더 많이 말할 수 있게 질문을 더 하거나 하지 않으니까.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추상적인 주제로 가버리면 별 상관없는 내 생각 이야기하기.



어짜면 이 회화 수업의 진짜 목적은 말하기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살아남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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