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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대초록 Feb 08. 2021

스페인은 왜 이렇게 커피가 맛없나요

커피 인간에서 차 인간이 되기까지



코스타리카에 살 때는 커피에 살짝 미쳐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품질 좋은 커피를 생산하기로 유명한 코스타리카에 살며 어찌 커피에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코스타리카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원두는 다 해외로 수출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 가면 신선한 원두를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슈퍼마켓에만 가도 산지별 다양한 원두가 한 면 가득하다. 매번 다른 원두를 맛보는 낙으로 살았고 커피 전문가 수업을 듣기도 했다. 매일 아침 정성스레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는 일은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혀끝까지 싸하게 퍼지는 커피의 과일 신맛을 즐기게 된 것도 코스타리카에서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커피 한 톨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연간 전 세계 평균 세 배에 육박하는 커피를 소비하는 나라답게 집에서 반경 1km 내에 산지별 원두를 입맛에 맛게 구입할 있는 카페가 다섯 곳은 되었다. 커피맛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좋은 카페의 나라 한국에서 계속해서 커피 인간으로 살다가 스페인으로 왔다.


스페인에서 처음 마신 커피는 충격적이었다. 너무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페는 매우 많지만 한국의 카페를 생각하면 안 된다. 전형적인 유럽 스타일 카페를 카페테리아(Cafetería)라 부르며 이곳에선 커피부터 아침식사, 간단한 식사, 술까지 제공된다. 메뉴에서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찾을 수 없고 스트레이트로 마시려면 에스프레소인 카페 솔로(Café solo)나 투샷을 내린 카페 도블레(Café doble)를 시켜야 한다.


흔한 카페테리아의 카페 솔로. 보통 이런 유리잔에 나온다.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하면  에스프레소 잔보다는 크고 아메리카노 잔보다 조금 작은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와 따뜻한 물이 같이 나와 직접 조제해 먹는다. 값은 한 잔에 2000원 정도로 매우 싸지만 좋은 원두를 쓰지 않아 그저 쓰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스페인 사람들은 대개 스트레이트보다 우유를 곁들이는 카페 꼰 레체(Cafe con leche)를 즐겨 마신다.


우유를 마시지 않기 시작하고 한국에서 카페라테를 마실 일이 없었는데 여기선 웬만한 카페테리아에 두유나 오트유, 아몬드유 같은 대체유 옵션이 있기 때문에 나도 두유를 넣은 카페 꼰 레체만 마신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이렇게 나온다


라테 아트까지 완벽한 오트라떼


물론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에 가면 좋은 커피를 파는 커피 전문점을 쉽게 찾을 수 있으나 내가 사는 말라가를 포함한 안달루시아의 도시에서 그런 카페는 매우 귀하다. 대신 오랜 시간 무슬림의 지배를 받은 안달루시아 지역에는 떼떼리아(Teteria)라고 하는 아랍 스타일 찻집을 흔히 볼 수 있다.


 떼떼리아에서는 아랍식 과자와 함께 홍차, 루이보스차, 녹차 백차, 청차, 아랍식 민트차와 같은 온갖 종류의 차를 마실 수 있다. 특히 아라비안 나이트, 알함브라의 꿈과 같은 몽환적인 이름이 붙은 가향차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또한 잎차를 무게를 달아서 파는 차 가게도 종종 볼 수 있어 커피보다 차를 즐기기 좋은 곳이 스페인 남부 지방이다.


떼떼리아의 모로칸 민트티. 녹차와 민트, 설탕과 함께 우려내 매우 달큼하다.




평생을 커피 인간으로 살아왔던 나도 맛있는 커피를 찾기 힘든 환경에 차를 자주 마시는 상황이 더해지니 자연스럽게 차를 즐기게 되었다. 사실 차가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니었다. 불교 신자이신 부모님을 따라서 절에 갈 때마다 스님이 내려주신 진귀한 차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고, 종종 스님께서 차나 다구를 선물로 주시기도 해 집에서도 종종 차를 내려 마셨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세포를 깨워내는 커피의 강렬함과 달리 서서히 에너지를 돌게 하는 차의 기운이 참 좋은데 이상하게도 차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 차에 맛을 좀 들여볼까 해도 언제나 커피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몇 달 전 영국 왕실에 대해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 완전히 빠졌었다. 영국 왕실의 일화와 함께 영국 현대사를 아우르는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틈만 나면 등장하는 티타임에 주인공들이 마시는 홍차가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마침 그 무렵 위상태가 안 좋아 몸이 점점 커피를 받지 않게 되었다.


허브차나 루이보스차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차는 카페인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우렸을 때 홍차의 카페인 함량이 커피보다 훨씬 적다고 하니 이참에 서서히 커피에서 차로 갈아탈까 싶었다. 녹차는 그리 좋아하지 않고 스님 덕분에 맛본 황차나 보이차가 입에 맞았지만 그런 차는 여기서 구하기도 힘들고 한국에서 더 좋은 퀄리티로 마실 수 있을 테니 영국인처럼 홍차를 파 보기로 했다.


그때부터 카페테리나아 떼떼리아에 갈 때면 커피 대신 이런저런 홍차 종류를 다셔 보았다. 홍차 관련 책 몇 권을 연달아 읽었으며 유튜브에서 온갖 홍차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홍차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의 차 시음기를 읽어 보는 등 한동안 차의 세계를 향해 열심히 돌진했다.



떼떼리아에서 마신 블렌드 루이보스 차



동네 차 가게에서 추천을 받아 가향 우롱차와 캔디 지역 실론차를 100g씩 사다 매일 아침 모닝커피 대신 모닝티를 마셨다. 예전에는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가는 걸로 아침을 시작했는데 이젠 찻물을 올리고 찻주전자에 계량한 찻잎을 넣어 차가 맛있게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걸로 하루를 깨운다. 스페인에 올 때 차 애호가 선배가 세계 삼대 홍차로 불리는 스리랑카의 우바와 이름은 기억 안 나는 매우 귀한 녹차를 나눠주셨다. 그때는 다구가 없어 아무렇게나 마셨는데 그 귀한 걸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게 이제와 속상하다.


커피를 마실 때는 동시에 뭔가 같이 하게 되는데 차를 마실 때는 신기하게도 오롯이 차만 마시게 된다. 마치 차 명상이라도 하듯 차를 마시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하는 무언가 있다.  왜 과거 선불교의 승려들이 차를 마시는 것을 수행의 일부로 보았는지 알 것도 같다. 이런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차 마시는 시간을 '차 명상' 시간이라 이름 붙였다.


잉글리시 브랙퍼스트와 비건 시나몬 롤



아침에는 실론차, 점심 식사 후에는 얼그레이에 오트유를 넣은 오트밀크티, 오후에는 가향 우롱차, 저녁에는 카페인이 없는 블렌딩 루이보스티, 이렇게 하루에 서너 잔씩 차를 마시던 어느 날 익숙한 느낌이 찾아왔다. 평소보다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리고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 아.... 또 도졌구나 위장병이. 아무리 커피보다 덜하다고 해도 하루에 서너 잔씩 마신 건 무리였나. 홍차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시음기를 구경하며 지금 산 차가 어느 정도 줄어들면 다음에는 이 차를 사봐야지 하며 목록을 만들어 놓은 게 무색해졌다. 이럴 때면 나의 병약한 위장이 야속하다.



영원히 견고할  같은 취향도 변한다.  덕에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기도 한다. 커피만 주구장창 마시던 내가 이렇게 차에, 그것도 홍차에 빠지게  줄은 전혀 몰랐으니. 앞으로 인생에서  어떤 재미있는 주제들을 만나  빠지게 될까. 하나에 매몰되기보다는 조금씩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사는 인생을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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