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열린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에서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아이가 아플 때는 엄마가 의사가 돼야 해요."
초보 엄마인 나는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잘 몰랐다. 아이가 아픈 것을 엄마가 빠르게 캐치하고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그러니까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는 뜻 정도로 받아들였다. 내가 아이 질병에 대해 의사 버금가는 판단을 스스로 내려가며 키워야 한다는 의미인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3월 초부터 시작된 아이의 코막힘 증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다 나았나 싶으면 다음날 다시 증상이 시작됐다. 어린이집에 처음 가면 밥먹듯이 아프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아침에 아이가 작게 재채기만 해도 내 가슴이 벌렁거렸다. 잠들기 전 아이가 코만 훌쩍거려도 내 마음이 같이 훌쩍거렸다. 엄마인 내 멘털은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아이는 계속 아프고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점점 예민해지고 잦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이가 아픈 것도, 안 낫는 것도 다 내 탓 같았다. 내가 알아채지 못해서 더 큰 병으로 번지진 않을까 불안했다. 아침에는 이 정도 증상으로 어린이집 보내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몰라 고민했다. 담임 선생님은 큰 질병이 아니라면 보내라고 하셨다. 그의 말마따나 아직 적응기간인데 자꾸 빠지면 아이가 더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초보 엄마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벅찬 고민거리였다. 또 요즘 병원은 대기가 기본 한 시간씩이다. 등원 전이나 등원 후에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늘 무거웠다.
지난 두 달여 동안 나는 병원을 네 군데나 다녔다.
아이의 코막힘 증상은 단순히 맑은 콧물이 줄줄 흐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끈적한 콧물이 막혀서 풀어도 잘 풀리지 않았다. 누런 콧물은 정도가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했다. 단순 비염보다는 부비동염 증상에 가까웠다. 이렇게 코감기가 오래간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작은 증상에도 병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아픈 게 내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첫 번째로는 늘 가던 A이비인후과를 갔다. 1 진료실 의사에게서 항생제를 3일 처방받고 증상이 호전되었다. 약을 다 먹고 다시 병원을 갔다. 1 진료실 의사가 휴무라서 2 진료실 의사가 진료를 봤다. 2 진료실 의사는 증상이 나아졌다며 먹던 항생제를 끊고 약을 바꾸었다. 이틀 뒤부터 아이는 잠도 잘 못 잘 지경으로 코막힘이 심해졌다.
두 번째로는 가끔 가던 B소아과를 갔다. 의사는 지난 진료 히스토리를 듣고서 항생제를 삼일 만에 끊은 것이 원인인 것 같다고 했다. 내게 그때 처방받았던 항생제 종류를 묻고는 같은 종류의 항생제로 다시 처방해 줬다. 항생제 처방 약 이주 만에 증상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틀 후부터 다시 누런 코와 코막힘이 시작됐다.
세 번째로는 멀리 있는 C이비인후과를 갔다. 택시를 타고 다녔다. 의사는 아이가 어린이집을 처음 다니면 오래 아플 수 있고, 어린이집 다니면 이 정도 코감기는 일 년에 열 번도 겪는다고 했다. 한결 안심이 됐다. 친절한 의사도 역시나 항생제를 처방해 줬다. 항생제를 일주일 넘게 먹어도 증상이 낫질 않았다. 다른 종류의 항생제를 오일 정도 더 먹었다. 다 낫는가 싶더니 또 이틀 만에 코막힘이 시작됐다.
나도 이쯤 되니 아이 코감기라는 게 하루이틀 만에 끝날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장기전이 될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택시 타고 가야 하는 병원은 그런 면에서 적절치 못했다. 다시 가까운 병원을 찾아봤다.
네 번째로는 동네에 있는 D이비인후과를 갔다. 의사에게 항생제를 오래 복용했음을 알리고 진료를 봤다. 의사는 친절했지만, 그도 별수 없었는지 역시나 항생제를 처방해 줬다. 이틀 만에 아이가 설사를 했다. 다시 병원에 가서 항생제를 바꿔 처방받았다. 아이가 또 설사를 했다. 다시 병원에 방문했다. 의사는 항생제를 끊자고 했다. 그리고 유산균과 정장제, 진득한 콧물을 맑게 바꿔주는 콧물약을 처방해 줬다.
무른 변을 계속 보던 아이가 일주일 뒤 갑자기 구토를 하고 설사를 했다. 다시 B소아과를 방문했다. 장염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유산균과 위장약, 지사제 등을 처방받았다.
항생제로 망가진 아이의 장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주가 넘도록 아이는 정상 변을 보지 못하고 있다. 코막힘도 아직 진행 중이다. 아이는 매일 코를 훌쩍이고, 풀어도 잘 풀리지 않는 코를 계속 머금고 산다. 그래도 컨디션은 괜찮아서 증상이 심하지 않을 때는 웬만하면 어린이집은 보냈다.
그러다 결국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설사를 바지에 싸고 말았다. 마침 하원하러 내가 도착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창문 너머로 고스란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집에서는 한 번도 대변 실수를 한 적이 없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친구들 다 보는 앞에서 배변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나도 당혹스러웠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아이가 안쓰럽고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등원거부가 시작됐다. 이제 좀 어린이집에 적응해서 울지 않고 등원하는가 싶었는데, 4월 말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지난 두 달간 이 모든 과정에서 엄마인 나는 뭘 잘못했을까. 병원을 너무 자주 바꾼 탓일까, 의사에게 너무 의존한 탓일까. 항생제를 주는 대로 받아먹인 내가 너무 무지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나의 불안으로 아이의 병을 키운 것 같아 미안했다.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는데, 그 마음이 되려 독이 된 건 아닐까 자책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하나 다 겪고 나니 깨달아졌다.
코감기 증상이 어느 정도일 때 병원을 가야 하고 안 가야 하는지 점차 나름의 기준을 갖게 되었다. 이 정도 강도에 이 정도 횟수의 재채기는 괜찮다는 것, 이 정도 코막힘에 이 정도 콧물은 괜찮다는 것에 대한 나만의 섬세한 표본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좋다는 병원을 수소문해서 다녀도 결국 의사들은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생제 안 먹고 우리 한 번 지켜보죠!"라고 먼저 말하는 의사는 한 분도 없다는 것 말이다. 항생제 처방을 하지 않길 바라면 내가 의사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대화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이런 것은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육아 선배들은 그때는 다 그렇게 아프다고만 말한다. 초조한 마음에 간절한 심정으로 맘카페에 질문을 올려봐도 열이면 열 대답은 같다.
'그때는 다 계속 아프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져요.'
'어느 정도의 증상에는 꼭 병원을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약을 안 먹어도 저절로 나아질 수도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사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아도 됩니다'하는 등의 섬세한 조언은 누구도 해주지 않는다. 이런 건 그저 엄마가 직접 겪고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올봄 나는 꼬박 일주일에 두 번씩 아이 손을 잡고 병원을 다녔다. 거리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 꽃이 이렇게 성가시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내 마음은 바빠 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꽃은 피어나는지 얄미웠다. 색색의 꽃들이 온 세상을 물들이느라 바쁜데, 나는 수시로 울며 등원하는 아이를 달래다가 진이 빠졌다. 사사건건 싫다고 떼쓰는 네 살 아이를 훈육하다가 내가 기진맥진했다. 햇살이 찬란한 아침에는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으면 코막힘 증상이 좀 나아지진 않을까 고민했다. 종일 훌쩍거리는 아이에게 코 좀 풀라고 다그치다가 오후가 다 갔다. 설사하는 아이를 지켜보고 신경쓰다가 주말이 다 갔다. 얼른 아이가 낫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매만지다가 한 달이 다 갔다. 내가 부족한 엄마 같다는 죄책감에 한숨짓다가 이 예쁜 봄날이 그만 다 가버렸다.
어쩌면 이건 엄마가 되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하지만 겪는 와중에는 무척 아프고 힘들다. 아이도 어린이집에 처음 갈 때는 3월 한 달 동안 적응기간을 거쳤다. 그러면서 서서히 엄마 품에서 떨어지고 새롭고 낯선 환경에 차츰 적응해 나갔다. 지금 이 봄날도 나에게는 엄마 적응기간이 아닐까 싶다. 별거 아닌 아이 코감기에 병원을 네 군대나 바꿔 다닌 호들갑도 지금 뿐이겠지. 앞으로는 돈 주고 하래도 절대 못 할 것 같다. 이 적응기간이 끝나면 나도 아이의 질병에 좀 더 유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엄마가 되어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