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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키우는 말

by 열대나무


우리 집에는 네 살 여자아이가 산다.


재잘재잘, 종알종알. 아이는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온종일 수다를 떨며 에너지를 쓴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물론이거니와 읽어주는 책, 오디오로 들려주는 동화, 어린이집에서 배워오는 동요들 속에서 말을 배운다. 옹알이만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아이가 말을 너무 잘한다. 가끔은 내가 아이와 대화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병아리 부리 같은 고 작은 입으로 어떻게 다 큰 어른 마음 녹이는 말을 속삭일 수 있는지 놀랍고 신기하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작고 귀여운 입이 매번 사랑스러운 말만 하는 건 아니다. 엄마 마음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뾰족한 말도 많이 한다. 아직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아이는 감정도 생각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더 사실적이고 날카롭다. 아이는 부모의 변화에 아주 민감하다고 한다. 내 표정과 말투, 행동 속에서 아이는 내 숨은 의도를 잘도 찾아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허를 찔린 듯 놀란다. 물론 앞에서는 내심 당황하지 않은 척 하지만 뒤돌아서는 숨죽여 나를 돌아보곤 한다.


아이는 말이 트이던 때부터 내게 팩폭을 날렸다. 20개월 즈음이었다. 아이와 함께 책상에 앉아 무언갈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작은 잘못을 저지르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이 표정이 금세 심각해지더니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분히 말했다.


"엄마, 왜 소리 질러?"


정말 이유가 궁금한 사람의 무구한 물음이었다. 나는 왠지 아이에게 혼나는 마음이 들었고 창피했다. 이미 당황한 나는 "네가 잘못하니까 엄마가 소리 질렀지!" 하며 비겁하고 못난 변명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하지만 뒤돌아서서 혼자 얼마나 그 순간을 부끄러했는지 모른다. 작은 일에 내 감정 하나 주체 못 하고 아이에게 큰소리친 것, 결국 내 잘못이면서 아이 탓이라고 변명한 것이 참 어른스럽지 못했다. 그 순간만큼은 어린아이지만 다 아는 것 같았다. 소리 지르고 화내는 것이 곧 훈육은 아니라는 것을.


그 후로도 아이의 촌철살인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구체적인 설명도 덧붙인다.


얼마 전이었다. 어린이집 하원을 하고 아이와 함께 집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이 샤워부터 시켰다. 샤워를 끝내고 나와서 장난감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거실 한편에서 내가 아이 머리를 닦아주고 있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왜 싹 안 치워놨어? 나 어린이집 갔을 때 엄마가 싹 치워놔야지. 그래야 내가 어린이집 갔다 와서 행복하지~."


하! 참!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남편도 안 하는 잔소리를 네 살짜리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이 집에서 청소를 하라 마라 하는 잔소리는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권력이었는데,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뀐 게 웃겼다. 엄마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기는 영악함이 얄밉기도 했지만, 본인의 행복을 들먹이며 엄마의 마음을 공략하는 영리함이 귀엽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부러 치우지 않은 내 의도가 들킨 것 같아 기가 막히기도 했다.


어제는 저녁식사 후에 내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근처 바닥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뭘 저리 몰두해서 그리나 싶어 나는 아이에게 뭘 그리고 있냐고 물었다.


"엄마가 소리 지르는 거 그리고 있어!"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아주 해맑게 말했다. 한참 후에는 다 그린 그림을 내게 가져와 눈앞에 펼친 채로 조곤조곤 설명도 해주었다.


"아침에 엄마랑 나랑 손잡고 가고 있었어. 근데 내가 자전거 타고 싶다고 떼를 썼더니 엄마가 소리를 질렀어!"

"왼쪽이 엄마야? 엄마 눈이 왜 그래? 화난 건가?"

"응! 엄마야. 화나서 그래."

"그럼 네 눈은 왜 그래?"

"나도 화가 났어."



왼쪽은 엄마, 오른쪽은 아이라고 한다. 바탕에 그려진 별과 하트는 아이가 아빠에게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니까 아이는 오늘 아침 등원하면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내가 유모차 자전거를 타자고 했더니 아이가 킥보드를 타겠다고 했다. 킥보드를 타고 나왔는데,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아이가 유모차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떼를 썼다. 이미 시간은 9시 10분이었다. 늦어도 9시 30분까지는 등원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지각할 걱정에 마음이 초조했다. 지금은 늦었으니 그냥 가고 하원할 때 유모차 자전거를 가져가겠다고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나는 아침부터 길거리에서 아이에게 소리를 질르고 말았다. 그렇게 즐거워야 할 우리의 등원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화를 낼 거면 요구사항을 들어주지나 말 것이지 나는 이번만 들어주겠다면서 화를 내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자전거를 가지고 왔다. 다음부터는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협박 같은 다짐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왜 엄마가 화를 내면서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변명하자면 요즘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날은 선글라스를 안 가져왔다고, 어떤 날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쓴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아침의 그 일이 여태 아이 마음에 소복이 쌓여있었다고 생각하니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나에겐 잠깐 화난 순간이었는데, 아이에게는 길게 마음에 남는 일이었던 건지 미안하고 걱정스러웠다. 다시는 감정적으로 아이를 대하지 말아야지 하고 나는 또 아이를 통해 반성했다.


육아가 어려운 이유는 아이라는 존재가 자꾸만 나를 성찰하게 한다는 데 있다.


코 파는 게 취미고,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는 게 특기인 요 철부지 어린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마음을 휘젓는다. 방금의 내 행동을 돌아보게 하고, 지난날의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하고, 한평생 내가 가져온 습관을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의 내 미래를 더듬게 한다. 내 말과 행동이 아이의 정서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사실 엄마는 매 순간 신경 쓰고 걱정한다. 어리석은 내 행동이 행여나 아이 마음에 상처를 남긴 건 아닐까 두렵다. 그래서 아이의 이런 말 한마디도 쉽게 무시할 수가 없다. 엄마에게는 내 마음보다 더 소중한 게 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다시 육아서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훈육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고,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육아 프로그램도 찾아본다. 그동안은 이런 엄마여야 한다, 저런 엄마여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득한 엄마 프레임이 무겁게 느껴져서 육아서적을 보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육아 공부를 한다. 사실 내가 얼마나 좋은 엄마가 되는가는 남에게 인정받을 때나 좋은 거지 나와 아이 관계에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와 내가 얼마나 질 좋은 상호작용을 주고받는지가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다. 나는 우리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서로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아이를 통해 내 마음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나만의 노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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