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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스트 Nov 29. 2018

[감정 마주 보기] 슬픔의 순기능

제일 기본 중에 기본

이번 글의 주제는 너무 쉬운 주제일지도 모릅니다. 슬픔이란 감정은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일 많이 들어온 단어이지 않나요? 사전에도 슬픔을 정의하는 한마디는 '정서 중에서 기쁨과 대응되는 비교적 기본적인 체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제일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한 슬픔,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아마 이 글을 다 읽을 때쯤이면 무릎을 탁 치며 머리가 반짝이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난 슬플 때...모자를 써....


슬픔이란 너무 숨 쉬듯 당연한 감정이라 깊게 생각해볼 이유도 없었을 거예요. 슬픈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모두에겐 기쁨과 행복. 불행, 슬픔이 있습니다. 기뻐서, 행복해서 눈물이 흐르기도 하지만 슬플 때 눈물이 제일 먼저 흐릅니다. 슬픔의 현상은 눈물입니다. 눈물은 즉 현실이죠.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행복한 삶은 어둠이 없으면 있을 수 없고 슬픔이 없으면 행복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슬픔을 표출하지 못할까요? 옛말부터 남자는 태어나서 3번만 울어야 한다는 이상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치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합니다. 왠지 나의 슬픔을 누군가 알아버린다면 약점을 잡힐 것만 같고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동정할 것 같은 두려움도 그런 이유겠지요.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늘 슬픔뿐이다
-월리엄 셰익스피어-



그러나 사람의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슬픔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감정중에 하나입니다. 실제로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아마 즐거움의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은 과연 어떤 기능을 할까요? 


슬픔의 3가지 그림자


슬픔에는 세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슬픔은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이론입니다. 두 번째는 슬픔을 유발하는 상황에서 잠시 떠나는 기능을 한다는 이론이고, 세 번째는 슬픔은 자기를 도와 달라는 사회적 신호라는 이론입니다.


슬픔은 나를 일상에서 고립시키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세상에 머물게 합니다. 이 상황을 잘 사용하면 그동안 나의 행동을 뒤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얻습니다. 슬픔이 가져다주는 상실감과 위축은 자기 성찰의 기회가 되는 것이지요. 시험을 망쳐서 슬프다면 다음 시험에선 이번보다 잘 보려는 마음을 주고, 친구와 싸워서 슬프다면 다음엔 더 잘해주도록 하기도 합니다. 실패와 패배에서 느끼는 슬픔은 사회적인 위축으로도 나타나는데 더 성숙한 자아를 위한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실패나 패배에서 자아성찰을 하진 않습니다. 나름의 타당한 방법으로 슬픔을 이겨냅니다. 누구는 낮잠을 듣거나, 산책을 하기도 하고 과격한 운동으로 슬픔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넘나 고통스럽다구!! 히에엑!!

 

또한 고통이란 단어 옆에는 슬픔이란 단어가 친구처럼 따라옵니다. 슬픔은 곧 고통입니다.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이 찾아오면 슬픔의 증거인 눈물이나 분노, 여러 신체 현상이 발생하게 되죠. 실제로 장기적인 고통은 슬픔 이외의 우울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슬픔의 세 번째 기능은 SOS의 역할을 합니다. 상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상대가 내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들어주기 시작할 때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더욱 깊어지기도 합니다. 근데 잠깐 대체 슬픔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걸까요?


걱정 마세요,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발생하는 슬픔의 원인은 내 잘못이 아닙니다. 보통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슬픔은 대부분 죄책감이나 자괴감이란 감정으로 느낍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원인이 외부에 있으면 개인이 통제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슬픔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본인 노력으로 슬픔을 완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지곤 합니다. 희망이 끊어진 느낌인 절망감과 무력감은, 슬픔의 일부입니다.  


슬픔과 비슷한 모습인 분노는 외부에서 오는 감정이라는 것이 동일합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얼굴이 바뀌어 버립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면 분노가 되고, 자신에게 돌리면 슬픔이 됩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날 차 버린 게 분명하다고 엉엉 울다가도 어떻게 나한테 이러나면서 헤어진 남자 친구를 욕하는 친구. 바로 그 모습입니다.


슬픔이여 안녕!


감정이란 역동적이어서 슬픔은 언제든지 분노로 바뀔 수 있고 우울이 행복으로도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너무 슬픈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슬픔도 행복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슬픔을 손에서 떠나보내며 안녕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 당당하게 맞이하는 안녕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른함과 달콤함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 낯선 감정을 슬픔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지 나는 망설인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게만 구애되는 이기적인 감정이며, 나는 그것을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 더구나 내게 있어 슬픔이란 언제나 고상한 것으로 비치고 있었으니 만큼. 

  프랑수와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중>


슬픔은 모든 감정을 빗대어 봤을 때 제일 강한 감정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감정들과 다르게 나를 성장시키고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죠. 좌절을 극복하게 하고 행복의 가치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며 슬픔을 대하는 태도로 세상을 사는 힘을 길러주는 이 감정. 슬픔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슬픔이 없다면 행복의 가치를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를게 분명합니다. 슬픔을 당했다면 그 슬픔을 이해하고 나를 위로해 보는 것도 좋은 자세입니다. 위로의 시작이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 이니까요.








심리상담 메신저 트로스트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마음이 행복한 삶을 만든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모두가 늦지 않은 때에 마음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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