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연료가 되고 어른은 나침반이 되었다.
3년 5개월 만의 합격 소식을 들은 그날,
기쁨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나를 긁었던 상처들이었다.
그 상처들은 나를 여기까지 이끈 가장 강력한 연료였다.
합격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까지, 집에서 걸어갔다.
서늘한 가을바람과 노을, 낙엽이 어우러진 보라매공원을 걸어가면서도, 계속되는 축하전화를 받았다.
3년 5개월, 길다면 길었다.
찰박찰박 낙엽을 밟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상념에 잠겼다.
사회생활을 하며 긁혀왔던 수년간의 긁힘들이 한 장면씩 재생됐다.
간이 안 좋을 것 같은 검은 안색의 팀장 M이 "너 앞으로 인생 그렇게 살지마 ^^" 라고 ^^ 이모티콘까지 붙여서 카톡을 보낸 2014년의 어느 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마침 11월 쯤이었다.
가스라이팅의 달인이었던 팀장 S, 남들한테만 분노조절을 잘했던 정치컨설팅회사 대표 G,
그들의 이름과 얼굴도 차례대로 떠올랐다.
나지막히 되뇌었다.
"당신들이 있어서 오늘이 있었습니다 ^^" 라고.
그들이 있었기에 나의 분노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처럼 가슴 속에 응축될 수 있었다.
이어폰으로 역전재판 OST를 들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축하연 장소에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에 다짐했다.
긁혔던 나날들을 내가 잊지 못했듯이, 이 날의 기쁨과 이 감정도 오래오래 기억하겠다고.
이 자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을 기쁘게 해나가겠다고.
초입부터 길게 줄서있는 인파가 보였다.
대방동 여성플라자는 H은행 전문직 마이너스통장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환희로 가득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다수가 김유미가 어떻고 최중락이 어떻고 김기범이 어떻고 윤성봉이 어떻고 김기홍이 어떻고 하며 자기들 나름의 친분감과 공통분모를 만들어가려 다들 노력했다. 쭈뼛쭈뼛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곳엔 200여개가 넘는 다 각자 나름의 기쁨들이 꽉 들어차있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여러 설명과 자기소개와 뒷풀이의 시간,
그리고 3차 면접을 지나 최종합격을 했다.
최종합격을 할 때까지 나에게 가장 고마웠던 "어른"은 G노동센터의 센터장님이었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이었던 센터장님은,
우리가 만든 노조도 "떡잎노조"라고 추켜세워줬고 관련 사업도 아예 한번 기획해보라고 적극적으로 조언도 해주셨다. 자신의 사용자로서의 위치를 늘 잊지 않고 "책임"을 지려 노력하시면서도, 노조활동가 선배 출신으로서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좋았다.
센터장님은 특히 자신의 네트워크 안에 있는 후배들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하길 원했다.
센터장님이 나에게 2차 시험이 끝난 뒤 합격자 발표 전에 언젠가 잠깐 국회에 들러
박용진 의원을 소개해준 것도 그래서였다.
한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으로 박용진 의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박용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나는 과거에 박용진이란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한때 출세주의자라 여겼다.
내 주변 사람들의 말과 뒷담화가 그에 대한 판단을 대신했다.
그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교때 그에게 양꼬치를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를 훌륭한 선배로 봤지만, 이후 그가 나와 다른 정당(민주당)으로 넘어가면서
"공천때문에 넘어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보다는 노회찬이란 정치인을 좀 더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게 정치컨설팅 회사 대표 G의 "노회찬 선배와 친하다"라든가, "노회찬 선배가 나한테 자주 담배도 주고 그랬지, 좋은 사람이었다." 같은 이야기에 혹해서 고통과 치욕의 기억들을 만든 2달의 시간을 보내게 된 매개변수이기도 했다.
다만 J사태와 P 서울시장 사건에서 그가 보여준 정치적 입장은 내가 그를 다시 보게 된 계기였다.
돌이켜 찬찬히 생각해보면 사실 깃발이 변했을 뿐, 그의 뜻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변했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유치원 3법까지...그가 젊은 시절부터 실제 국회의원이 된 뒤 가져온 행보에는 "한 떨기 붉은 마음"(一片丹心)이 있었다. 반대로 그를 가장 세게 비난하던 몇몇은 시간이 지나면서 입장과 논리를 바꿔갔다. 사람에 대한 판단이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그 아이러니가 내 오판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요컨대, 내가 그에게 느낀 점은 "깃발만 달라지고 노선은 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이야말로 "노선"이 바뀌고 "뜻"이 바뀐 사람들이었다.
센터장님이 과거에 내게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을 판단할 때 평판보다 궤적을 봐야하고, 순간순간의 행보보다 그 순간의 축적을 봐야 한다고.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 관점을 박용진이란 사람에게 다시 적용해봤다.
그런 생각의 정리 끝에, 센터장님과 함께 박용진 의원을 뵈러 가자고 말씀드렸다.
그는 나를 기억못했지만 다행히 그의 수석보좌관은 같이 양꼬치를 먹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 나눠 라포가 형성된 다음에 그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 그때 우리 갈라질때 우리 욕하던 놈 맞지? 맞구나." 라고.
그런 소탈한 조직 분위기도 내게는 좋아보였다.
나중에 또 볼 날을 기약하며 30여분 짧은 만남을 센터장님과 함께 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 만남과 깨달음은, 단순히 한 정치인에 대한 재평가를 넘어
내 커리어의 방향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끄는 계기였다.
공인노무사 수습을 하면서 수습노무사 모임인 '노동자의 벗', 노벗 활동을 한 것도 센터장님의 영향이 컸다.
지침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선배", "어른"이 곁에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일은 없었다.
정말 좋은 직장이었기에,
수습 노무사로서 노무법인에서 실무수습을 하려면 이 센터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었다.
이렇게 아쉬워하며 떠난 직장은 처음이었다.
늘 실무자들의 의견에 귀기울여주시고 실무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사업에 반영해주신 분이었다.
후배들이 더 성장하길 바랬기에 나의 자기계발도 방해보단 응원을 해주셨다.
불필요한 회식은 최소화하고 대부분 회식은 점심에 진행했다.
바로 그런 덕분에 나는 노무사 2차 수험시기에 순공시간 4시간 30분을 사수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긁힘들은 내 커리어 형성의 연료들이었지만,
센터장님은 내 커리어 형성의 나침반이었다.
실무수습 5개월을 위해 내 인생에 첫 행복했던 직장생활이 끝나고,
실무수습도 끝나게 되었다.
그 기간동안 내 아내 W도 변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원하던 로펌 - 성폭력 사건 피해자 대리를 맡는 공익변호로 유명한 로펌- 에 들어갔다.
W는 늘 여성인권과 아동인권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관심사를 위한 최적의 로펌에 들어갔다.
우리 부부 둘 모두, 노무사와 변호사 라이센스를 통해
비로소 "하고싶은 일"과 "업"이 일치하는 "덕업일치"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또 다른 깨달음과 치유의 시작이기도 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