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가 뜨기 전이 제일 어둡다

암중모색, 도림천을 걷는 시간

by 유노유보

나의 4번째 공인노무사 2차 시험이 끝났다.

시원섭섭했다.

경영조직론 마지막 3문을 써 내려갈 때는 시험 종료 한 10분 남겨놓고

오른팔에 감각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무릎 꿇고 1시간 넘게 있다가 다리에 피가 몰려 움직이지 않는 그 저린 느낌,

바로 그것이 내 팔과 어깨에 왔었다.

거의 반은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오직 의지력으로 버텨가면서 써 내려갔다.

3문을 다 쓰고 <끝>을 적고 생각했다.


"이젠 더 원이 없고, 후회가 없다. 떨어지면 하늘의 뜻이다."라고.


이틀의 시험이 끝나고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강사들의 총평을 쭉 훑어봤다.

다행히 지난 시험들처럼 불의타로 인해 빗나간 것들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인사대천명이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한자의 뜻을 그때 깨달았다.

진인사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천명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었다.

사람의 일을 다 하지 못하면, 하늘의 뜻을 기다릴 자격조차 없는 무자격자인 셈이다.

"사람의 일을 다 한다."라는 말을 실천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깨닫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


시험이 끝난 뒤, 퇴근하고 매일같이 어두운 도림천을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서울 관악구 베트남동 호찌민촌을 탈출할 수 있을까?'


베트남 호찌민-무이네 신혼여행을 가서 너무 황홀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무수한 미세먼지와 오토바이들은 정말 문화충격이었다. 사람들 만나면 과장 섞인 농담을 했다. ‘여긴 서울이 아니라 호찌민이야!’—도시나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뜻은 아니었다. 그만큼 시끄러웠다는 얘기다.


대학동 고시촌은 다 좋았지만, 배달음식 오토바이는 마치 한여름 모기떼처럼 들끓었다. 특히 나는 소음에 매우 예민한 편이었고, W와 나의 신혼집은 초록색 5515번 버스의 종점 근처 도로변에 있었다.

그런 각도의 경사로에도 사람이 살았고 집들이 우후죽순 지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민국 주택공급 부족의 심각성을 깨닫곤 했다.


1부 버스 엔진소리가 끝나면 2부로 오토바이의 부아아앙하는 소리가 새벽까지 계속 됐다.

난 우리 집 침대가 도서관 열람실이 아닌데도 이어 플러그를 끼고 잤다.

모기는 한철이었지만 오토바이는 사철이었다.


내가 올해 시험에 붙고 아내도 변시에 합격한다면, 아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저녁마다 생각에 잠겨 도림천을 걷다 보면

어느새 보라매공원까지 한 바퀴 돌고 다시 고시촌으로 향하곤 했다.

그때는 그저 고민 없이 사냥하고 있는 도림천의 왜가리와

졸졸 흐르는 물가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두 달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본 드라마는 <대군사사마의>였다.

특히, 매일같이 몇 번이고 돌려본 부분들이 있었다.

그 중 백미는 <공성>편의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화 장면이었다.


"나는 스스로 내 두 다리도 분질렀던 사람이오. 그날, 난 나 자신에게 말했소. 만약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면 모든 이를 뛰어넘겠다고... 하지만 끝내 내 마음속의 두려움은 넘어서지 못했소. 난 신성에 와서 당신이 맹달에게 쓴 서신을 읽었소. 거기서 한 구절을 보았지. 아쉽게 동쪽을 바라보노라. (이이동망) 공명 당신은 총명한 사람이니 당신이 말해보시오. 이이동망, 무슨 뜻이오? <아쉽게 동쪽을 바라보노라>의 "바라는 것"은, 평생의 포부요, 바라는 것은 평생의 영광이요, 바라는 것은, 일생을 바쳐 가장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오.

"중달, 틀렸소. 중달, 아쉽게 동쪽을 바라보노라. 바라는 것은, 업적이 아니오. 아쉽게 동쪽을 바라보노라. 바라는 것은 바로 일생을 바치는 것이니, 아쉽게 동쪽을 바라보노라. 바라는 것은, 그것은 그저 시간이오."

- 대군사사마의:호소용음, 9화 中


"시간"

'슈지엔'이라는 중국어 발음을 정확히 발음하게 된 때도 그때쯤이었다.


그랬다. 나는 끊임없이 도림천을 걸었다.

그 끊임없이 걷는 행위는 바로 내 내면의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괴로웠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 조금이라도 단 한 장이라도 더 보지 못한 채로 시험을 친 데 대한 괴로움과 합격자 발표일을 직면하기까지의 두려움이었다.


내가 합격자 발표일까지 바라보는 것은 내 평생의 영광이고 포부고 업적이라고 되뇌고 설레였지만,

사실은 그때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나의 시간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의미없이 정보공개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공인노무사 채점 관련 기안, 공문 결재가 어디까지 올라갔나 제목들을 들여다보곤 했다.


W의 변시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점점 학교 열람실에서 늦게까지 있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날들이 많았다.

집에 혼자 있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도림천을 걷고, 또 걸었다.


초속 5cm에 나오는 노래,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를 들으며 걸었다.

한번 더,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면.


이 이상의 무엇을 잃어버려야 마음을 용서받는 걸까.
어느 정도의 아픔이라야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도림천의 서늘한 밤을 하염없이 걸으며 들었던 노래의 첫 두 소절에 수험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들어있었다.



책을 볼 시간도 많아졌다.

그즈음 나온 책인 <김지은입니다>를 다시 봤다.

에필로그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살아서 증명할 것이다."

나는 나의 전 직장에서 비로소 "가스라이팅"이라는 건 남녀의 연애뿐 아니라 위계와 위력이 도사리는 어느 관계든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상황이었다.

그곳은 내가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주 퇴사자가 발생하던 곳이었다. "노동자의 권익"을 생각하는 곳인데 채용공고가 참 자주, 많이 올라왔다.


그 책을 보면서 다시 다짐했었다.

"2달 동안 평가를 해서 결론을 내자"란 말에 사시나무 떨듯 괴로워하며 "잘못된 저성과자"로 도매금 당했던 그때,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그리고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 책은 성폭력 문제에 대한 책이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과 착취에 대한 책이었다.

내가 그 책을 다 읽고 코가 찡했던 건, 일요일 저녁마다 월요일이 오는 게 괴로워 울고 한숨 쉬고,

그걸 보던 지금의 아내가 같이 화내고 걱정해 줬던 바로 그 순간순간에 더 슬프고 미안해서 더 우울했던 그런 기억들이 떠올라서였다.


다짐했다.

"끝. 까. 지. 살아남아서, 증명하겠다"라고.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다시 보기도 했다.

진시황의 승상, '이사'의 이야기를 보면서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이사는 관청의 변소에 사는 쥐가 더러운 것을 먹고 사람이나 개가 지나가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큰 곳간에 들어가 보니 그 안의 쥐들은 곡식을 배불리 먹으며 사람도 개도 근심 않고 살았다. 이사는 탄식하였다...."남의 일 같지 않구나. 나도 '곳간의 쥐'처럼 살겠다."

성공에 대한 간절함과 불안에 내 마음은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다.


합격자 발표 전날인 11월 3일, 그날은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도림천을 거닐며 유튜브를 봤다.

그날 밤은 추웠다.

집에 돌아와서도 잠이 오지 않아 기네스 캔맥주 하나를 사서 안주 없이 마셨다.


기네스를 마시다 문득,

바닥에서 내 벨트라인까지 쌓여있던 모의고사 시험지들이 보였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내일 저걸 다 버릴 수 있을까... 아님 저걸 묻고 또 더블로 가야 할까.'


잠이 안 와서 다시 유튜브를 틀었다.

"언니한테 말해도 돼"라는 프로의 "펭수" 클립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해가 뜨기 전이 제일 어둡다"


시간을 보니 11월 4일이 되어 있었다.

새벽 1시.

유튜브 1편이 내게 가슴 벅차오르는 안정감을 주었다.


지금이 내게 제일 어두운 시간일까. 더 어두운 시간이 남아있는 것일까.

더 이상의 어두움은 없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8시 55분, 눈이 떠졌다.

아내는 차마 못 깨우고 있었다고 했다.

같이 보자고 했다. 후회는 없으니까.


8시 59분 57초, 58초, 59초, 00...


한국산업인력공단 로그인하고 PC로 들어갔다.

2020년 제29회 공인노무사 구분 2차 수험번호 01210635 시험결과 보기...

보기를 눌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자기야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


아내는 그야말로 방방 뛰면서 내 어깨를 팡팡 쳤다.

눈을 떴다.


내 동공에 다음의 문구가 반사됐다.

"공인노무사 (2차)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때,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 인생에 해가 뜨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18화수험의 기쁨과 슬픔 ②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