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험의 기쁨과 슬픔 ① (2019)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Low Risk, High Return 투자

by 유노유보

막 결혼한 직장병행 수험생으로서 내가 다른 수험생들과 좀 더 나은 특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함께 공부하는 동지, W였다.


"로스쿨 노동법 해설"같은 책도 변시와 노무사 시험을 같이 공부하는 처지에서 훨씬 구하기 쉬웠고,

집에서 좀 더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신혼집에 놓을 소파 대신 카페 테이블을 두고 저녁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같이 공부하거나,

아내가 로스쿨 열람실에서 공부할 때면 나 혼자 책상에 앉아서 최소 하루 순공(순수 공부시간) 4시간 30분을 채우려 노력했다.


그 기간 동안 저축하지 않았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산다"는 말을 실천했다.

내 월급은 모두 나와 아내의 생활비, 그리고 나의 학원비, 아내의 학비로 쓰였다.

우리 집도, 아내의 집안도 넉넉지 않았다.

아내는 학창 시절 늘 장학금을 탔다.

집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집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로스쿨의 장학제도는 다행히 잘 설계되어 있었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등록금 면제에 더해 소정의 생활비 장학금도 받았고,

나와 결혼해서는 등록금 전액 면제로 장학금을 받았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나도 로스쿨 제도를 저주하며 사시 부활! 을 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내를 통해 체험한 로스쿨 제도는 사법고시 체제였으면 절대로 변호사가 될 수 없는 사람,

오래 버틸 수 있는 재산적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꽤 공정한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나 또한 아내의 등록금이 면제되었기에 나와 아내의 생활비와 학비를 내 월급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


조금의 남은 돈이 있다면 그 돈으로 글루콤과 초콜릿, 멀티비타민과 마그네슘, 유산균 등을 매달 구매하고 아내와 함께 건강을 챙겼다. 수험생활을 잘하는 건 체력이 50% 이상이었다. 특히 나와 아내는 늘 공부시간이 부족하고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불안은 없었다.

말일에 5자리, 심지어 4자리 숫자밖에 남지 않은 통장잔고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나와 내 아내에게 쓰는 돈은,

이 세상에서 내가 투자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고수익 상품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가장 확실한 정보와 확신을 갖고

"우리"라는 단일 주식종목에 올인한 장기투자였다.

나는 내가 오마하의 현인은 아니더라도 대학동 고시촌의 현인이라 확신했다.


나는 내 아내를 믿었다. 그래서 내 아내가 선택한 "나"라는 상품도 온전히 믿게 되었다.

나와 내 아내의 공부에 투자하는 것은 가장 결과가 확실한 Low Risk, High Return 투자라고 확신했다.

그 보증인은 내가 가장 믿고 있는 아내였다.



수험기간 동안에는 주말마다 나만의 루틴이 있었다.

스몰웨딩을 했기 때문에 한동안 일요일 저녁에는 나 또는 아내의 친한 친구들을 매주 여는 피로연 형태로 초대하여 저녁을 성대하게 먹었다. 1주일의 스트레스를 날리는 시기였다.


약속이 없는 날은 내가 학원에서 시키는 공부를 다 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나뉘었다.

다 했으면 더 공부 안 하고 그냥 쉬었다. 넷플릭스나 티빙 등을 통해 다큐멘터리, 예능, 드라마를 봤다.

다 못했다면 일요일 저녁에 나머지 공부를 했다.

나보다 훨씬 많은 공부를 했고, 공부량이 요구돼서 항상 시간이 부족했던 내 아내도 나를 위해 함께 해줬다.


고시촌 신혼집 근처의 '발루토'라는 카페에 가서 초코말차케이크와 따뜻한 카페라떼의 고소하고 달콤한 내음을 음미하며 함께 뽀모도로 공부법에 따라 "Study with you"하는 데이트를 주로 했다.

(뽀모도로 공부는 25분 공부하고 5분 쉬는 공부법이다. 또는 변형 50분 공부, 10분 휴식 방식이 있다.)



우리 부부에게는 시련도 있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우리 부부에게 "J 사태"는 엄청난 방해였다.

아내는 아내대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나도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정부와 대통령을 지지하던 사람으로서 "절차적 정의"와 "공정"을 믿었기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사회적 담론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늘 노력을 통해 어려움을 돌파해 왔던 사람들이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십수 년을 살았던 내 아내 W, 타이어 공장 오염물질에도 난방비 지원해 준다는 말에 좋아라 하는 공단 근처 아파트에 살며 일 있을 때마다 타지로 가서 일하는 건설 노가다 용접공 아버지를 둔 전형적인 블루칼라 집안에서 살았던 나.


우리 둘이 서울에서 함께 만나 결혼까지 한 건, 오로지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 사회라는 믿음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남들도 다 그만큼은 한다"는 말의 그 "남들"이 대체 누구냐고,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무슨 일베 같은 사람들이냐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리에겐 정당한 노력의 생태계가 바로 생존을 위한 동아줄이었고, 사다리였기 때문이었다. 이걸 무슨 "이대남 담론"으로 후려지는 것도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것도 내가 지지했던 정치세력과, 나와 친했던 선배들과, 어른들의 사이에서...


그때 시험이 며칠 남지도 않았을 때였는데, 이 이슈 가지고 아버지와도 말다툼을 많이 했었다.


아빠는 J를 열심히 옹호했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아빠가 돈이라도 많았으면 내가 말도 안 해요. 근데 우리 집은 돈도 지지리도 없잖아요? 그런 거 나한테 해주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J 장관을 옹호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걸 아무렇지 않게 봐요? 좀 능력 있어서 해주든가! 해주지도 못했으면서!"


그때 아빠 말이 걸작이었다.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웃펐다.

그땐 어이없어서 아빠 앞에서 일부러 비웃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또 눈이 시큰했다.

왜, 아빠가 나한테 미안해 해야 하는가? 왜?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나도 나의 공부가 부족했고 운이 부족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좀 더 뿌리치고 공부에 집중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시험 막판에 일어난 이 사태로 나는 한 달 동안 꽤 많은 공부시간에 집중력을 잃었고, 결국 1점 차로 그 해의 노무사 시험에서 탈락했다. 3번째 낙방이었다.


불공정을 욕하며 공정한 노력을 게을리했으니,

실패 또한 공정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나보다 10년 전쯤에 공인노무사 시험에 붙었던 G구의 구의원 형과 친했다.

그는 2010년 지자체 선거부터 출마해, 2018년, 3번째 선거만에 당선됐다.

시험에서 3번째 떨어졌을 때, 그가 해준 위로가 있었다.


"야, 선거는 4년에 한 번이지만, 시험은 1년에 1번이야. 안 되면 내년에 한 번 더 하면 돼."

"너는 인마, 안되면 내년에 또 하면 되잖아. 그게 얼마나 좋은 건 줄 알기나 해? 야 넌 시험 3번 치는데 3년 걸렸잖아? 나 봐봐. 나 선거 3번 했는데 되는 데 8년 걸렸어."


그 말을 듣고 처음 들은 생각은, '나는 인복이 참 많네.'였다.

그 말대로였다. 위안이 됐다.

덕분에 빠르게 심기일전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한번 떨어지면 4년을 준비하는 걸, 난 떨어지고 바로 또 내년을 위해 준비할 수 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했다.


한 번은 내 아내가 "형사재판실무" 시험 때문에 힘들어했다.

공부할 건 너무 많은데, 시간은 너무나 부족하다고. 자기 머리의 한계가 온 거 같다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마침, 내게 힘이 되는 위로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기도 했다.

"자기야. 꼭 잘하려고 하지 마. 잘 안 해도 돼. 중간만 하면 되지.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되잖아~

남들 하는 만큼만 해."


그러자 아내가 내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뭐? 남들 하는 만큼?! 남들 하는 만큼이 쉬운 줄 알아!!"


한 손으로 쥐어 잡은, 둔기 같은 느낌의 두꺼운 책을 펄럭거리며 그녀가 내게 말했다.

"이걸 몇 시간 내에 다 보고 몇 시간 내에 내가 몇 장을 써야 되는지 알기나 해 자기는?"

"모르면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를 마! 나 너무 미치겠으니까!"


당황했다. 나는 위로하고자 했던 것인데...

내가 간과했던 건, 그녀가 서울대 로스쿨을 다닌다는 사실이었고,

"서울대 로스쿨"에서 "남들 하는 만큼", "중간만 하면 되지"라는 것은...

그녀에게 엄청난 압박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수험생활로 인한 그녀의 스트레스에, 나는 싹싹 빌면서 케이크와 커피를 대령했다.

다행히 그녀의 불같은 화는 케이크로 진화가 가능했다. 물론 그녀의 아량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동네 주점에서 맥주 한잔 하며 그날의 회포를 풀기로 했다.


맥주를 마시다가,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내가 학회장이라서 이번에 학회 홈커밍데이를 준비하는데 말이지. 자기야. 자기 전 여친 이름이 보이더라?"

"....!"

"요새 뭐 한대?"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그렇구나. 혹시 아나 싶었지~ 어디 무슨 J 가있는 거 아닌가?"

J로펌은 당시 와이프 동기들 사이에 공익활동을 많이 하는 곳으로 (결국 다른 로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대형로펌임에도) 인기가 높은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거긴 아닐껄?"

그러자 W가 무표정하게 맥주잔을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거기가 아닌 걸 자기가 어떻게 알아?"

...!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아닐 것이란 거지. 내가 아는 게 아니고~"

그래도 기분 좋은 화해의 자리였기에 우린 곧 서로 웃었다.


2019년,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지만 알콩달콩 신혼의 행복이 있던 시기였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keyword
이전 16화"노동복지센터"에 만든 노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