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 대신 저항을 선택하고, 마침내 변화를 만들다.
...딸깍.
메일함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Re: G구노동복지센터 노동조합 설립신고의 건
굵은 글씨의 "Re"를 보자마자 클릭했다.
G구청장의 도장이 찍힌 설립신고필증 pdf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앨버트 허쉬만의 이론이 생각났다.
충성심은 이탈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이탈 가능성에 토대를 둔다.
심지어 가장 충성스러운 구성원마저도 이탈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간혹 구성원과 조직의 대립에서 가장 중요한 협상력이 되어준다.
원상회복 메커니즘으로서 항의방식의 성공률은 이탈의 위협이 뒷받침되어야 높아진다.
... 항의방식의 효과는 이탈의 가능성 덕분에 강화된다.
- 앨버트 O. 허쉬먼, <Exit, Voice, and Loyalty> 中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레드와 골프와 일의 공통점은 힘을 너무 주면 안 된다는 거야. 힘을 빼고 해야 잘 돼."
"잘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때론 모두를 힘들게 하고, 그 "잘해보자"하는 마음이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것이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조직에서 "같이 하는 일"인 경우에 더욱 그렇다.
조직문화와 소통의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건,
누군가의 선의가 타인에겐 엄청난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선의"를 가진 사람이 조직 내 권력을 갖고 있을 경우, 그것은 권력형 폭력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주입식" 소통의 시도가 바로 "주인의식을 가져라"라는 가스라이팅일 것이다.
주인의식과 자발적인 노동과 도움(이를 학문적으로는 "조직시민행동"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노사 양측에게 엄밀하게 말하면 "공짜노동"이다.
그러나 실제 사업을 하는 조직에서는 이 자발적인 "공짜노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조직이 더 성과를 낸다.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조직은 이런 행동들이 더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억지로 강요받는 공짜노동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지만, 내가 원해서 하는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내 삶의 동력이다.
"주인의식"이 내면의 명령이 아니라 타인의 명령일 때가 바로 착취의 시작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조직에서 주인의식에 대한 강조는 곧 "독선"과 "폭력"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은 탈출을 생각하거나, 저항을 생각한다.
센터는 전체 상근자가 4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조직이었다.
이전에 일했던 사람 많았던 조직들과는 달랐다.
그래서였을까.
이른바 "주먹구구식" 사업변경이 너무나 잦았다.
그런데 구청의 보조금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주먹구구식 사업변경은 다시 일일이 구청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의 페이퍼 워크와 공무원 응대 등에서 상근자들의 스트레스가 쌓여만 갔다.
나는 그 가운데 지연되던 페이퍼 워크의 상당 부분을 해결해 인정받아
그 공으로 사무국장으로 승진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체 상근자들의 피로와 불만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곳의 센터장은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잘되는 걸 많이 하고 싶었다.
그 얘기는 잘 되지 않는 것은 다른 걸로 빨리 바꾸고자 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안 되는 건 "내 탓이 아니"라 다른 상근자의 탓이어야만 했다.
이 센터에서의 초과근로와 저조한 실적은 그저 다른 실무자들이 일을 못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일을 못해서" 초과근무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센터가 최대 인정되어 받을 수 있었던 연장근로수당은 월 15시간의 초과근로에 대한 연장근로수당뿐이었지만, (휴일에 나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휴일근로수당이나 야간근로수당, 연장근로수당의 중복가산은 인정되지 않았다. 8시간 초과 휴일근로 또는 밤 10시 이후의 야간근로가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내가 오기 바로 직전 달만 해도 3명의 실무자들 각각 출퇴근 태그로 찍힌 초과근로시간은 각각 53, 71, 92시간 등이었다.
내가 "2달 동안의 저성과자 평가" 시기에 기적처럼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로 인한 갈등이 센터 내에 지속되면서 4명 중 2명이 이곳을 떠났기 때문임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무국장으로 승진된 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은 것도 있지만
자신의 책임을 전임 사무국장의 "일못"으로 치환시키기 위한 측면도 있어 보였다.
실적과 성과를 내고자 하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리더로서의 책임"에 대한 회피가 결합하면
그 결과는 재앙밖에 남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 잿더미가 되거나
조직이 잿더미가 된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우린 다 같은 평등한 활동가니 어쩌니 수평적인 의견공유 어쩌고 하는 말보다,
근로자와 사용자,
사업주와 노동자,
사장과 직원,
리더와 팀원
이 구분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용자, 사업주, 사장, 리더가 진짜 멋있는 사람이란 것을.
내가 사무국장이 되자마자 또 다른 상근자가 퇴사했다.
센터장은 여전히 페이퍼 워크에 대한 부담을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사업변경을 이야기했다.
나와 다른 상근자들은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그때 공인노무사 공부를 하던 나에겐 정공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은 노조 설립이었다.
노동조합은 사용자에게 "임금ㆍ근로시간ㆍ복지ㆍ해고 기타 대우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을 단체교섭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단체교섭으로 더 이상 자주적 합의의 여지가 없는 주장의 불일치 상태에 대해서는 "노동쟁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2019년 당시 노조법 제2조)
우린 센터장이 사업의 혼란스럽고 지나지게 잦은 변경으로 실무자들의 야근이 조장되었다면, 이는 근로시간과 복지, 기타 대우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대한 교섭을 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노조는 근로자 2명만 있어도 만들 수 있고, 일단 만들어지면 노조법 상 권리를 갖는 법적 단체였다.
센터장과 이 사안과 관련한 직접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결국 센터의 수탁기관인 민주노총 등에도 교섭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조법 교과서에만 보던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실제로 해봤다.
G구청 공무원은 매번 사업계획 승인과 구청 지침 관련 공문에 대한 소통만 하다 "노조설립신고"와 "설립신고필증" 등에 대해 소통을 해야 하니 황당해하고 어이없어하기도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복지"센터인데 여기에서 "노동조합"을 설립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조법 강의를 들은 지 3년 차가 돼 가던 나였다.
몇몇 행정실무적인 부분의 내용보충이 한두 번 오간 뒤,
"G 노동복지센터 노동조합" 설립신고필증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신고필증을 받자마자 수탁기관인 민주노총 등을 상대로 사용자로서의 단체교섭에 임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ILO 결사의 자유 관련 핵심협약을 비준해 오라고 했던 민주노총이었기에 당연히 이 교섭요청에 대해 수용적인 자세를 보이리라 기대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K신문에서 당시 나와 N사 관련 의논했던 기자님이
이번엔 노동 쪽 출입으로 오게 되었다면서 재미있는 기사가 있는지를 내게 물었다.
나는 기사거리인지는 모르고 그냥 이런 일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4명밖에 안 되는 오순도순 일할 것 같은 그런 민주노총 산하 기관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흥밋거리라고 했다.
그는 곧 내게 이런저런 취재를 했고, 난 성심성의껏 응했다.
이윽고 신문에 기사가 나왔다.
"민주노총은 노조와 교섭에 임하라", 사용자 자리 앉는 노동자 대변자
그때부터 뭔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던 센터장은
그러나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타까웠고, 화도 났다.
회의를 해야할 때도,
센터장은 노트를 덮어두고 펜을 몇 번 굴리다 멈췄다.
"그 건은..."뒤가 없었다.
회의실 시계 초침만 말없이 째깍째깍 흘러갈 뿐이었다.
맞은 편의 다른 상근자는 형광펜 뚜껑을 뺏다 끼웠다만 반복했다.
서로의 시선은 갈 곳 없이 테이블에만 부딪혔다.
그 누구도 의자를 먼저 밀지 않았다.
이 기사가 나온 후 내게 몇몇 기자들이 후속 보도를 위한 취재전화를 했다.
나는 엉겁결에 우리 노조의 공보담당이 되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는 순간, 다소 상기된 목소리의 상대방이 말을 이어갔다.
"00일보 김00 기자입니다. K신문에 나온 노조 교섭 관련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런 여러 전화 중에는 굴지의 보수언론사였던 C일보도 있었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숨을 고르고 말했다.
"확인 가능한 범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죠."
...
나는 내 일터의 노동조건이 좋아지길 바란 것이지, 일터가 시끄러워지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로 민주노총 등 사용자 측에 알렸다.
어서 교섭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00본부 등 수탁기관 측에서는 이런 나의 알림을 교섭에 대한 진지한 시도라기보다는,
일단 "큰일 났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K신문 보도 후 며칠 뒤, 센터장 교체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민주노총 ㅇㅇ본부에서 찾아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노동조건에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들이 있었는지 청취하고 돌아갔다.
곧이어 센터장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별도의 교섭 없이 우리가 요구한 모든 조건들이 받아들여졌다.
사실 일방적인 사업변경을 하지 않고 향후 변경이 필요할 경우 꼭 상근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게
수용된 요구조건이었으니, 사실은 조건이랄 것도 없었던 셈이었다.
허쉬만의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라는 책에 나온 내용,
"로열티"란 필연적으로 이탈 가능성을 토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다.
진보언론사였던 K신문과 달리, 굴지의 보수언론사 C일보에서 이 사건을 다룬다면,
이 건은 드라이한 가십성으로 끝나지 않을 공산도 높았다.
그랬기에 나도 취재에 응하고자 했어도 꺼림칙해서 계속 구체적인 부분들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대답을 미뤄오기도 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센터장 교체 등이 아니라 바로 "소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뒷맛이 찝찝한 승리(?)였다.
다행스럽게도 새로 오신 센터장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그 분은 자신의 위치, "사용자"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자 했다.
수평적이었지만 책임은 회피하지 않았다.
난 그 점이 좋았다. 저런 게 리더십이라 생각했고, 나의 존경을 더 해 열심히 일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고, 수탁기관의 빠른 판단으로 내가 다니는 센터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직장병행 수험생인 나도, 진짜로 수험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셈이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