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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랑도 나의 힘이었다

나의 구급상자, W에 대하여

by 유노유보

W. 그녀와 처음부터 결혼을 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 그녀가 나와 사귀는 것을 망설인 이유도

"더 많은 연애를 하고 싶은데 일단 사귀면 못 헤어지고 결혼할까 봐" 였었다.


나는 그녀와 연애를 한 지 1년 정도 지난 뒤, 그녀의 우려를 현실화시키기로 결심했다.

크리스마스에 오사카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전에 결혼한 친구에게 수소문하여 3부 다이아 반지 종로 어디 가성비 좋은 적절한 곳이 없는지

알아보고 미리 맞췄다.


둘이서 하는 첫 일본여행은 설렜다. 그리고 청혼, 프러포즈를 준비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관람차를 타고 오사카의 야경을 감상하다,

고도에 의해 여성이 가장 심장이 떨릴만한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왔을 때,

그때 반지를 끼워주면서 프러포즈하는 게 나의 계획이었다.



오사카의 크리스마스이브 야경, 그날따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대관람차를 타니 막상 떨렸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었다.

그리고 관람차가 조금씩 조금씩 흔들렸다.


아...


겁이 나진 않았지만, 너무 가슴이 떨려서 가장 높은 지점을 지나치고 있었다.

W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않아? 관람차 먼저 타자고 한 사람이 뭐 이렇게 무서워해~"


아? 어...? 음...


떨리는 마음의 소리로 그녀에게 반지를 끼우려 하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 줄래?"


W는 웃었다.

참, 오래도 걸렸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반지를 끼우려 할 때 반지의 크기가 맞지 않아

손가락에 중간에 더 안 들어가는 꼴이 웃겨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름 정확하게 맞춘다고 했는데...

다행히 몇 달 동안은 무상보증기간이라 반지 둘레 크기를 바꿀 수 있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W에게 들어보니 계속 뭔가 하려고 하는 티가 역력해서 뭘 말하려나 보다 했는데,

마침 여행하다 대관람차 코스가 있길래, 아 여기서 하나 보네 하고 했다고 한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바람에 흔들거리는 대관람차에서,

오사카의 붉고 푸른 밤은 빗방울과 함께 반짝거렸다.



여행이 끝난 뒤엔 구체적인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나는 그녀가 로스쿨에 들어가 나보다 잘 살고 어리고 똑똑한 남자 사람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미혼의 상태로 오래 놔두는 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유혹당할 일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도에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했듯이,

나도 다른 남성들이 절대 W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공약해야겠다,

내가 그녀의 유일한 한 사람임을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우리 둘이 함께 쓴 <혼인계약서>였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W는 나한테 "암시"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난 그게 암시인지 잘 몰랐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러 주요한 내용 중 특히,

"아이의 성은 엄마 성으로 한다"

는 내용을 반드시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서울대 로스쿨 나온 대다수의 20대 남성이 웬만하면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통계적으로 불효자(?)는 매우 적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더욱 그랬다.)


나의 부모님은 처음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 니 맘대로 해라."라고 했다가,

나중에 엄마가 나한테 다소 서운하다는 뉘앙스를 갖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 성을 가진 아빠는 조용한데 왜 내 성도 아닌 엄마가 더 서운해하는 것인지...


어쨌든 나만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먹혔다.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있든 없든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나도 그런 이야기를 했든 안 했든 W와는 서로 남편과 아내가 될 운명이긴 했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렇게 해서 우린 결혼을 하기로 했다.

양가 부모는 부르지 않고, 가장 베스트프렌드인 각자 3명의 친구들을 불러

(그러니까 총 6명의 하객이었다.) 혼인신고날 카페 하나를 빌려 스몰 웨딩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몇 달 뒤 이사 갈 신혼집에서

매주 주말마다 "피로연"을 겸해 사람들을 초대하여 예를 다하기로 했다.


다행히 이런 우리 둘의 마음과 결심을 양가의 가족들도 좋든 싫든 인정해 주셨다.

감사한 일이었다.


2018년, 내가 그 시절 겪고 있던 정신적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내 아내가 될 사람, W 덕분이었다.


긁힘이 계속되면 상처는 점점 더 깊게 패이고 패여 파상풍과 패혈증으로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그 긁힘을 단순한 긁힘과 흉터 내지는 삶의 "훈장"정도로 끝내게 하는 나의 구급상자.

그게 나에겐 W였다.


좋지 않은 직장 내 환경,

직장병행이라는 수험환경,

저녁마다 팔이 아플 정도로 펜대를 굴려도 늘 시지프스가 돌을 나르는 것 같은 느낌의 공부.


공부라는 건 내게 마치 디스크 조각모음 같았다.

디스크 조각모음을 한 두 번 해본 사람은 안다.

100퍼센트 다 모으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 같다.

짜증 나서 조각모음 포기하고 안 해버리고 한 20~30 퍼 해놓고 컴퓨터 끄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조각모음을 빨리 하려면 컴퓨터를 켜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조각모음만 해야 하지만,

그 또한 멀티태스킹이 되는 윈도 환경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뭔가를 하면 조각모음하는 시간은 또 무한정 한없이 길어진다.


그리고 난 직장병행 수험생이었다. 공부"만"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같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던 W가 뒤늦은 수능공부를 하던 동생에게

지나가듯이 전화로 해주는 말이 내게도 들렸다.

30분이든, 1시간이든, 꾸준히 그날 공부를 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최선을 다 한 거야.


그 말 한마디가 직장병행 수험생이었던 나를 지탱한 버팀목이었다.

디스크 조각모음은 마치 운기조식과도 같은 것이다.

공부는 뭔가를 하기 위해, 쟁취하기 위해 기를 모으는 행위다.

필살기를 쓰기 위해 기를 모으듯이, 그저 꾸준하고 묵묵히 나의 기를 모으고, 최적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당한 팀장의 가스라이팅, 숨 막히는 조직에서의 일상들 속에서 다짐했다.

완벽한 최적화를 이룰수록, 나는 더 성능이 좋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의 발판을 반드시 이룩해내고 말 것이라고.



<장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불균수지약 소용지이야不龜手之藥, 所用之異也"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은 그 쓰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송나라에 손 안 트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 이 사람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솜 빠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약을 손에 바르면 겨울철에도 솜 빠는 일을 할 수 있었다. 한 나그네가 이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을 찾아와 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 금 백 냥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가족과 친척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솜 빠는 일을 조상 대대로 해 오고 있지만 수입은 몇 푼 안 된다.

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 단박에 금 백 냥을 받는다. 그러니 약 만드는 법을 팔도록 하자.”


이렇게 하여 금 백 냥에 약 만드는 법을 알게 된 나그네는 그 길로 오나라 왕을 찾아갔다.

그리고 겨울철에 월나라와 싸우는 데에 이 약을 쓰도록 설득했다.

이 약을 바른 오나라 군사들은 손이 트지 않고 동상에 걸리지 않아 싸움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오나라는 크게 승리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오나라 왕은 기뻐서 그 나그네를 제후에 봉하고 식읍을 하사하였다.


공부를 할 때마다 생각했다.

"공인노무사"라는 라이선스, 내게는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과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약을 어떻게든 얻고 싶었다.

나는 금 100냥을 좇는 삶 이상의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감을 얻은 것도, 유지시켜 준 것도, 모두 W의 공이었다.

스몰웨딩을 하겠다고 알렸을 때(그래도 회사에는 알려야 하니까) 팀장이 대뜸

"근데 이걸 결혼식이라고 봐야 돼? 아니, 그냥 좀 애매해서~"

라고 말했을 때나.


"2달간의 평가를 통해 당신을 내보내겠다"라는 통보를 들은 이후,

며칠 뒤에 공인노무사 2차 시험에 다시 불합격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그때마다 나를 믿어준 내 아내, W의 위로와 공감이 없었다면,

그런 자신감은 모두 끝내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결국, 긁힘 이전에 내 내면을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믿음과 사랑의 힘이야말로 커리어를 만드는 자산이었던 것이다.


직장병행 수험생활로 힘들었던 그 시기에도 아내가 옆에 있어줬다.

늘 옆을 지켜준 나의 든든함이 나만의 루틴이 되었고, 그 루틴이 성과가 되었다.


나는 이직한 회사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받았고,

3달 만에 그 센터의 사무국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저성과자" 취급받았던 바로 전 직장에서의 평가와 판단을 깨끗하게 "틀렸다"라고 날려버린 순간이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당신을 버티게 한 구급상자는...누구였나요? 지금 당신에게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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