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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의 기쁨과 슬픔 ② (2020)

분노를 연료로, 나의 관도대전을 향해

by 유노유보

지나친 분노는 평정심을 잃어 공부의 적이 된다고들 하지만,

2020년 그해의 분노는 내 가슴의 우라늄이고 플루토늄이었다.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덮쳤다.

전업 수험생들은 미증유의 사태에 페이스가 흔들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나는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었고,

나의 신혼생활은 즐거웠으며,

고락을 함께 한 스터디메이트, 나의 아내 W가 나의 공부지킴이였다.

코로나19도 나의 공부를 막진 못했다.

GS1기 말부터 노동법 등 전 과목에서 주말반 모의고사 랭커 바로 밑이거나 랭커가 되기 시작했다.


공부에 가속이 붙고 재미가 붙었다. 지킬 위치가 생기니 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이상한 나라의 리스의 "붉은 여왕"이 생각났다.

다들 열심히 공부했고,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결국 등수의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좋았다.


스포츠 다큐멘터리, "플레이북"에 나오는 경구를 늘 되새겼다.


그냥 계획을 짜고 실천해라. 잘못될 수도 있고, 매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왜? 그냥 해라 계속. 실패는 해도 실패의 희생자는 되면 안 된다.


헌유예의 압박감은 헌유예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 나의 막판 루틴을 깨는 사건은, 시험을 한 달 반 정도 앞둔 7월에 발생했다.


2020년 7월 7일 아침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때 엄마로부터 온 전화를 난 아직 기억한다.


"너네 아빠가 어젯밤에 핸드폰 집에 두고 나가서 지금까지 아직도 안 들어왔어!!"

엄마의 울먹거리는 목소리.

말없이 나갈 사람이 아닌데... 아닌데... 하며 엄마는 밤새 뜬 눈으로 지새웠다고 했다.

새벽까지 발만 동동 구르던 엄마는 아침에서야 실종신고를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말했다.

"엄마, 아빠가 이 시간까지 밥을 안 먹었을 리 없잖아요. 최소한 카드는 들고나갔을 거 아니야. 경찰한테 카드 사용내역이라도 빨리 조회해 달라고 해요 얼른."

"그거 하려면 수색영장 쳐야 된대. 근데 단순가출일 수도 있으니 바로 할 수가 없대."


그런 전화를 엄마한테 받고 나서는, 출근해서도 사실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밥을 먹고 엄마한테 담당 경찰의 번호를 넘겨받았다.

자초지종을 다시 물어보니, 엄마는 아빠의 과거 프로작(우울증 처방약) 투약 사실을 경찰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아빠는 프로작 단약 후 2년이 넘었다. 그러나 난 우울증 약을 과거에 투약했다란 사실을 경찰에 이야기하면 그들이 그래도 빨리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너네 아빠가 자살할 사람도 아니고 그런 걸 뭐 하러 말해"라고 말했다.

난 그게 중요하지 않았고, 빨리 경찰이 아빠를 찾게 하는 게 중요했다.

경찰에 그 사실을 말하니, 엄마한테 다시 전화를 한 뒤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려줬다.

실종전담팀 경찰이 지금 외근을 나갔는데, 돌아오는 대로 되도록 영장을 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고.

그리고 일단 인근의 CCTV들을 돌려보고 있으니 기다리라 했다.


다시 2시간 정도 지나서 실종전담팀 경찰과 내가 통화했고, 주된 연락은 최초 신고자인 어머님한테 할 거다,

수색영장은 곧 신청해서 발부받을 거다. 일단 핸드폰 위치추적은 소용이 없으니 CCTV 계속 보고 있으니 일단은 기다려라. 일단은 기다리란 말만 계속 들었다.


그리고 다시 몇 시간이 흘렀다.


퇴근시간이 다 됐을 때에야 엄마가 내게 전화를 했다.

아빠가 빗길에 옥천에 있는 계모임 같이 하는 친구분 집에 가다가 사고가 났다고.

아빠는 저체온증으로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있다고.


수색영장 같은 건 그때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아빠는 경찰이 찾은 게 아니라

그냥 그날 그 동네 도로 지나가던 어떤 시민이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서,

다른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발견된 것이었다.


경찰이 아니라,

어떤 선량한 시민의 신고정신이 우리 아빠를 구했다.


천만다행으로 차는 완파되지 않았다.

그저 빗길로 인해 미끄러진 뒤 범퍼랑 유리창이 좀 깨졌을 뿐이었다.

아빠의 외상은 크게 없었다.

다만 몇 시간 동안 깨진 유리창으로 비가 들어왔고,

아빠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뒤 비에 젖어 저체온증 상태였다.

만약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오후 반차, 다음 날 연차를 썼었다.

시험을 치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았을 것 같은 대전 집에 시험 직전에 내려오게 됐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아빠는 깨어나지 않았다.

섬망 상태에서 계속 꿈을 꾸듯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아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5060 아버지와 함께 하는 부자관계란 것이 늘 그렇듯이, 지금도 그렇게 많이 소통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제 60이 넘은 아빠가 그런 모습으로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중환자실에 있으니 한없이 착잡하고 참담했다.


한편으로 원망스러웠다.

시험이 한 달 반도 안 남았는데, 이제 이번이 4번째 시험인데... 하...라고 생각했다.

사경을 헤매는 아빠 앞에서도 공인노무사 2차 시험 생각을 하는 나도 나였고

그 순간 인간도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오만 생각이 들었다.


저체온증 상태에서 발견된 지 24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의식불명이면

그 예후가 매우 안 좋다는 의사 친구들의 말도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같이 뒷일을 의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내 의지력은 엄마를 닮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하루하고도 반이 꼬박 지났을 때, 다행히 아빠가 깨어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빠는 5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한 달여를 계속 휠체어를 타고 다녔고 한동안 걷는 게 시원찮았다.

폐렴으로도 몇 주 고생했다.

그래도 퇴원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7월 9일, 나는 대전 집에서 엄마와 함께 수습을 하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뉴스속보를 보았다.


"P 서울시장 실종"

P 서울시장과 관련한 여러 논란과 그 사건에 대해서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단지, 실종신고 20여 분 만에 경찰 2개 중대와 드론, 경찰견이 동원되어 와룡공원 인근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걸 들었을 때, 그리고 곧 소방당국도 수색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뉴스를 전해 듣고,


내가 느낀 가장 맨 처음 감정은 "억울하고 분함"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가슴 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아버지가 실종됐을 때, 엄마가 끝까지 숨겼던, 남들 앞에서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과거 정신과 약 투약 사실까지 이야기하고 나서야 경찰 나으리들께서 수색영장 치는 걸 무려 "긍정적으로 검토"하시겠다는 말을 들었다.


CCTV를 몇 시간 동안 뒤지다가 (몇 명이 뒤졌는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결국 몇 시간이 지나서 경찰이 아니라 신고한 지 9시간이나 지나서야 어떤 선량한 시민분이 신고해서 아빠를 찾았다.


그런데 무슨 집 나간 지 4시간도 안돼서 실종신고를 받아주고,

신고받자마자 10분 20분 만에 경찰 2개 중대에 드론에 소방당국까지 총동원해서 사람을 찾고.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가?


성인실종에 대한 별의별 뉴스를 찾아봤다.

사실 보통의 성인 실종신고는 빠르면 빠를수록 골든타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성인 "가출"의 가능성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받아준다.

엄마도 그래서 굳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에서야 아빠가 안 오니까 그제야 경찰에 신고했던 거고.


그런데 누구네 집 아빠는 그런 관행이나 행정적인 통상례와 상관없이 집 나간 지 3~4시간 만에,

신고한 지 10분 만에 경찰 당국과 소방 당국이 역량을 총동원했다.


우리 아빠 집 나간 지 3~4시간 뒤

내가 파출소에 실종신고 했다고 상상해 봤다.

십중팔구 내게는 드론 대신 비웃음이 날아올 것이다.

나는 "거 어디 아버님 어디 동네 사우나나 가셨는지 한번 더 찾아보시고 좀 기다려보고 신고하세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란 말을 들었을 것이다.


P 아들과 나는 1살 차이인데,

P의 아들과 아빠의 아들인 나는 같은 대한민국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와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했다.

나는 결코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구나.


칼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했던가.


내가 그때 느낀 감정이 그것이었다.


J 사태는 내게 비극이었다. 그로 인해 막판 공부를 하지 못했다.

P 서울시장 사망사건은 내게는 정반대였다.

나는 그 어떤 때보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내가 그와 같은 시민임에도 같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고, 열심히 공부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평등한 세상을 쟁취하고 싶었다.

반드시 더 열심히 살고 공부해서 반드시 더 출세하고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얻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났다.

서울공고 시험장으로 가는 이틀,

나는 시험장으로 향할 때마다

<삼국지 조조전> 게임의 BGM 중 관도대전 부분을 무한반복해서 틀어댔다.


4번째 치르는 공인노무사 시험,

그것은 내 인생의 관도대전이었다.

조조가 오소를 칠 때,

그 사생결단의 마음가짐으로 2차 시험 이틀을 보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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