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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아본 사람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만든 '어공'

by 유노유보

인생의 중요한 전환은 대부분 예고 없이 찾아온다.

계획했던 개업 대신, 나는 내 이름 세 글자보다 내 글을 먼저 알아봐 준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공인노무사 실무수습이 끝나고 법인에서 나와 개업 구상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친한 구의원 형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앞으로 대선 경선 끝날 때까지 한 두 달 정도 남았는데, 남은 두 달 박용진 의원 좀 도와주면 어때?"


그때는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국면이 한창이었다.

나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일전에 단 30분이라도 직접 만나본 정치인이었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대선 경선캠프에서는 메시지 쓸 사람이 부족하다고 했다.

처음 겪는 대선 경선이었다.

TV 토론 준비와 매일매일 터지는 뉴스들에 대응하는 "입장문", "메시지"를 작성하는 일들이 많았다.

대선 국면에서는 각 지역신문들의 인터뷰(대부분 서면인터뷰 요청이 많았다. 엄청나게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을 모두 후보의 대면 인터뷰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청에 대해서 대응하는 일들도 맡았다.

물론 자원봉사자에게 처음부터 이런 일을 맡기진 않았는데, 의원과 수석보좌관, 그리고 메시지를 담당하는 비서관이 몇 번 나와 이야기 나눠보고 내 글을 한 두 번 보더니 나더러 이쪽 파트 일을 맡아 도와달라고 했다.

시간 날 때 전화해서 지지호소 하는 봉사나 한두 달 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너무나 영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캠프였기에 큰 일들이 내게 왔다.

한두 달이라도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은 미래 비전보다는 "대장동" 3글자가 모든 이의 마음속을 뒤덮었다.

그리고 정치에서 늘 언제나 반복되는 법칙은 "A냐 아니냐"를 묻는 선거는 언제나 A가 승리한다는 것이었다.

"이재명은 안된다"를 이야기하기 위한 바로 그 킬러 콘텐츠가 역설적으로 그 경선을 "이재명이냐 아니냐"의 선택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고, 어떻게 보면 씁쓸한 일이었다.

"이재명이냐 아니냐"의 경선이 된 이상, 우리 후보에게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대선 경선 막바지 연설준비를 하면서 후보는 나에게 전화로 산재 보상과 관련한 내용을 물었다.

유족연금과 산재보상에 대한 여러 법적인 내용들을 말하고, 왜 물어보시는지 물어봤다.

마지막 연설에 써야 할 것 같아서 물어봤다고 했다.


그 연설이 대선 경선 마지막 날의 서울합동연설이었다.

“화천대유 곽상도의 아들은 어지럼증으로 산업재해 위로금만 50억 원이랍니다”

"김용균 씨에게는 1억 3000만 원, 평택항에 이선호 씨에게는 1억 3900만 원, 구의역 김 군에게는 겨우 7900만 원이 이들에게 주어진 산업재해 보상금이었다"

"화천대유 이러면서 전직 국회의원과 판·검사들 자녀는 이름값으로 몇 십억씩 처먹고 뻔뻔하게 사는데, 왜 우리 젊은이들은 저렇게 죽어야만 하느냐"


그 연설은 당시 대선 경선국면에서 울림이 있는 연설로 화제가 됐다.

내가 그 연설문을 직접 쓰진 않았지만, 화제가 된 메시지에 조금의 보탬이 될 수 있어 좋았다.

그도 내게 고맙다고 말해줬다.


4위로 대선 경선을 마친 뒤, 얼마 안 있어 나는 의원실에서 수석보좌관과 면담일정이 잡혔다.

수석보좌관은 내게 "의원이 아주 맘에 들어한다"라고 하면서 혹시 대선 본선 때도 캠프에 오며 가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이제 곧 개업을 해야 해서 그건 곤란하다고 하니, 풀로 상근 해달라는 것은 아니고, 일 없을 때 오며 가며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대선 본선에서 여당의 선거캠프에서 일해본다는 것도 어찌 보면 큰 기회였기에, 거절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2022년 2월이 되었다. 대선 투표가 얼마 남지 않은 날,

나는 박용진 의원실 5급 선임비서관 자릴 제안받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개업해서 얼마 되지 않아 월수익 400~500까지 되는 구조는 만들었지만,

다행히, 아직 자문사는 4개에 불과했었다.

이 추세라면 곧 사업 규모 때문에 정리하지 못하고 국회에서 일할 기회는 영영 오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나의 첫 사업에 대한 아쉬움과 국회라는 새로운 기회에 대한 설렘이 교차했다.


그리고 처음이었다.

내가 채용공고에 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본 사람이 제안을 해줬다는 것이.


2022년 3월 14일,

어쩌다 보니 공무원, "어공"이 되었다.

그것이 나의 국회 생활의 첫 시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상처를 연료로 삼아 얻어낸 라이선스를 잠시 내려놓고,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의 곁에서 새로운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국회는 나에게 또 다른 긁힘과 나침반을 선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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