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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도 아이는 생긴다

킹메이커를 꿈꾸던 밤, 아빠가 되던 새벽

by 유노유보

국회로 오게 된 계기까지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멈칫, 했다.


국회에서의 일화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문득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그간 국회 보좌진 출신 작가들은 자신의 활동을 주로 직무 중심의 소개나 국회 "업무" 일반에 치중해 묘사해 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실제 경험을 쓰더라도, 최대한 일반화되고 정제된 일화 위주가 다반사였다.

왜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직무에 대해서만 써놓는 것일까.

아마 나도 멈칫한 그 이유 때문이겠지.


정치권은 칼날 위를 걷는 곳이다. 나의 소탈하고 솔직한 그 어떤 마음을 표현해도, 그 표현의 '워딩' 하나하나가 자칫 잘못하면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화살은 나보다는 내가 함께 했던 의원을 겨냥하기 일쑤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나의 직업적 세평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민 끝에 많은 사람들은 입을 닫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입을 닫게 되다 보니 결국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 업계의 꽤 많은 사람들이 SNS를 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살얼음판 같은 이곳에서 수년간의 루틴으로 만들어진 자기 검열을 잠시 뒤로 한 채,

최대한 정치인, 정치적 문제가 아닌 보편적인 "직장인"으로서의 국회 보좌진의 삶을 써보려 한다.


다른 보좌진들은 대선, 총선, 지선, 전당대회 등 각종 선거 다 경험하려면 몇 년은 있어야 한다던데,

나는 너무 짧은 시간에 다 겪어 버렸다.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지금도 헷갈린다.

다 끝나고 지나왔으니 좋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나는 대선이 끝나고, 임용된 바로 그다음 주에 지방선거에 투입되었다.

여의도 국회 사무실이 아니라 지역구 사무실, 서울 강북구로 출근했다는 이야기다.

강북은 멀었다.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해도 지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예비후보 선거운동기간 동안에는 아침 출근인사에 보좌진 결합이 필요 없었다는 점이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9시에서 9시 5분 사이에 3층 사무실에 도착을 하면 - 박용진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 언제나 푸짐한 김밥과 컵라면, 여러 간식이 있었다.


점심에 가장 많이 간 곳은 미아사거리 근처의 김치찌개 집과 삼양동 사거리의 부대찌개집 등이었다.

(선거국면에서는 음식점도 내 맘대로 가면 안 됐다. 최대한 우리에게 우호적인 여러 음식점을 치우침 없이 골고루 방문해줘야 한다. 노무사적 관점으로 '점심은 휴게시간' 운운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았다. 밥 먹는 것도 선거운동이었다.)


지역 선관위와의 업무소통은 늘 일정한 답답함이 있었다.

중앙 선관위와 지역 선관위 유권해석이 서로 달라 곤란했던 적도 몇 번이었다.

ARS와 문자의 홍수 속에,

나는 오는 족족 스팸처리해 오던 선거문자와 전화들을 성실하고 집요하게 모니터링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상대 후보의 문자와 ARS를 통해 그들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지,

선거법 위반행위를 하고 있진 않은지 등을 파악해야만 했다.

그렇게 모은 정보는 후보들에게 공유하고 의원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그 보고는 다시 우리의 새로운 업무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지역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7명의 지방의원 후보 중 4명을 청년으로 공천한 점이었다.

의원과 10여 년 고락을 함께 했던 구의원이 아니라 젊은 2030 청년에게 공천을 준 일 등이 그 예다.

그런 일련의 결정은 나에게도, 지역 주민들에게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동네 표를 위해 지역 토호에게 나눠주기 식 공천을 하거나, 고락을 함께 한 측근만 챙기는 정치를 하지 않은 점은, 나에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줬다. 만약 그가 자기 사람 먼저 챙기는 정치인이었다면, 사실 나는 몇 년 있다 경력만 채우고 다른 데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측근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건 정치인에겐 엄청난 용단이었고,

그가 그런 멋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미래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치 않았다.


그런데 정치란 것은 또 복잡하다.

사람이 멋있다고 또 무조건 뽑아주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지방선거의 선수는 박용진이 아니고, 그와 함께 하는 다른 동료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이 동네 주민들에게 매력을 어필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구청장 경선 예비후보로 나섰던 우리 측 후보, C 선배는 안타깝게도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설상가상으로,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 통과와 윤석열 정부 출범이 맞물리며 우리 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본 선거운동 기간, 아침저녁 출퇴근인사, 오전 오후 상가인사를 위해 삼양동, 송중동, 송천동 등 강북을의 여러 동네를 때론 걷고, 때론 트럭을 타고 다니며 후보를 수행했다. 다행히 모두가 열심히 뛴 덕분에 5월 중순 열세였던 몇몇 후보들도 역전에 성공했고,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우리 후보들 모두가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당은 그 해 지방선거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박용진이 민주당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나서야 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의원실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파도 조직도 없는 의원이 여론조사 지지율 몇 번 잘 나왔다고 당대표 선거에 나갈 수 있겠냐,

"97세대"론은 허상이다, 아니다, "97세대" 분위기는 있긴 한데 사람 들다 K의원 지지로 결의 다 됐단다. 의원 50명이 그렇게 밀어주기로 했다 등등...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다.


선임비서관인 내게도 의원은 의견을 물어왔다.

난 그때까지 나온 모든 여론조사와 기사, 칼럼 등을 종합하여 계량적 분석에 근거해 의견을 냈다.

내 의견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저쪽 당은 젊은 당대표인 L 후보가 지방선거까지 승리로 이끌었음. 반면 이재명 의원은 '셀프공천 논란', P 전 원장의 '자생당사' 메시지 등으로 안팎에서 흔들리는 상황, 저쪽 당의 L만큼 "새로운 정치", "새로운 민주당", "이길 수 있는 혁신 민주당"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음. 따라서 이번 전당대회는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음"


그는 내 의견이 담긴 페이퍼를 전달받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수석보좌관의 의견, 그 외 바깥의 여러 그룹들에도 의견을 물어봤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의원실 식구들에게 결심을 전했다.


"연이은 선거 때문에 고생한 것 너무 잘 알아요. 여러분에게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당대회에 당대표로 출마합니다."


늘 투덜투덜 댔지만 맡은 일만큼은 늘 여의도 최고의 에이스였던 행정비서관 K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한숨에 의원이 살짝 눈으로 웃으면서 "미안해~ 이번에 고생 좀만 더 해줘~"라고 했고, K는 삐진 목소리로 네~라고 했다. 그 모습에 우리 모두 웃음이 터졌다. 앞으로 펼쳐질 힘든 일정들이 뻔했지만, 나는 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각오를 다졌다.


그의 당대표 출마선언문 작성을 함께 기초했다.

그 이후에도 전당대회 기간 내내, 나는 박용진의 메시지팀으로 일했다.

그가 핵심 메시지를 선정해 뼈대를 놓으면, 내가 살을 붙이는 식이었다.


당대표 후보 등록 마감일, 이재명 후보가 출마했다.

슬로건은 "이기는 민주당"이었다.

절묘했다.


내가 전당대회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시기와 이재명 후보의 출마에는 1달의 시차가 있었다.

그 1달 사이, 나는 물론이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L 국민의힘 당 대표 축출사건이었다.

대통령이 그렇게 서울-부산 보궐선거와 대선, 지방선거까지 전국 선거 3연승을 이끈 당대표를

그렇게 무참하고 무식하게 내치는 것을 전 국민이 목격했다.

그 사건은 생각보다 꽤 큰 사건이었다.


이제 "이기는 민주당"을 위해 필요한 건 더 이상 새로운 혁신이나 젊음이 아니었다.

당원들에게 필요한 건 이제 패악무도한 여당과 대통령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잘 드는 칼,

온갖 풍파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굳건한 사람이었다.


시대정신이란, 정세란 아무리 잘 예측해도, 예측하려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말했던가.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고.

사람이 아무리 백날 일을 잘 꾸며놓아도 형세와 인심이 영 딴 판이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슴속에 누구나 삼천 원쯤은 갖고 있다는 말처럼,

정치권에 있는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천하삼분지계 하나쯤은 갖고 있다.

그러나 제갈량을 꿈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시류를 읽지 못한 방구석 제갈량으로 남는다.

나도 결국 정치권에 한 1만 명쯤 존재한다는 그 '방구석 제갈량'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우리 후보는 그렇게 가장 유리한 형세에서 가장 불리한 정세로 바뀌는 와중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것이 운이란 것이고, 그것이 시대정신이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당대회 예비경선 기간, 혼자 밤에 영화 '킹메이커'를 봤다.

당의 비주류인 '김운범'이 어떻게 신민당의 대선후보까지 되는지, 전당대회 장면이 입체적으로 그려진 영화.

나는 박용진 이 영화의 김운범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운범처럼 박용진도 강원도의 중앙위원 3~4명을 만나기 위해 고성, 속초, 횡성, 평창을 하루에 오가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중앙위원, 대의원과 당원들을 만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계파와 조직이 없으면 '이삭 줍기'와 면대면, 맨투맨 전략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여러분 제가 지금 제일 불안한 게 뭔 줄 아세요? 어제 날 찍어주겠다던 중앙위원님이 어제 제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불안했어요."


연설 첫마디로 중앙위원 다수를 빵 터뜨린 그의 연설.

그 또한 그의 애드리브가 아니라, 준비된 연설문구였다.


계파도 없고 조직도 없던 박용진 후보는 이재명 후보와 본선에서 맞붙게 되었다.

8명의 후보 중 3명만 오르는 본선에 진출한 것이었다.


예비경선부터 본선, 전당대회까지의 하루하루가 전쟁의 연속이었다.


2022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는 내게 많은 기회와 도전이었다.

그리고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전당대회였다.


그때 내가 박용진 의원이 지정하고 엄선한 야마에 따라 입장문과 연설문 초안을 쓰는 메시지팀의 주축이었던 건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진짜, 그런 것은 그 당시의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2022년 8월 초의 어느 날로 기억한다.

"자기야, 나 임신했어!"

카카오톡으로 온 사진 메시지에는 선명한 두 줄이 찍혀 있는 W의 임신테스트기가 있었다.

곧 함께 산부인과에 갔다.

의사가 우리 부부에게 작은 점 같은 것을 보여줬다.

나와 W가 첫 아이를 대면한 순간이었다.


W의 첫 로펌은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구조사건과 공익변호로 유명한 로펌이었다.

그래서 W는 늘 자신의 일에 긍지가 높았고, 보람을 느꼈다.

피해자들의 손을 잡고 세상의 불의에 맞서는 그녀의 모습을 때로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곳은 사건이 너무 많이 몰렸다.


W의 퇴사 직전 3개월 평균 수면시간은 5시간을 채 넘지 못했다.

그녀의 어깨는 짓눌렸고, 눈가에는 항상 피로가 드리웠다.

한 번은 집에 오다가 졸음운전으로 크게 사고가 날 뻔했다.

그때 이후로 그녀도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좋은 곳이지만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어떠냐고 권유를 했다.


그녀는 결국 앞으로 그 로펌에서처럼 성범죄 피해자를 위한 공익변호, 구조사건들을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존경하는 K 대표 변호사와의 첫 로펌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녀의 퇴사 이후에는 내가 다시 바빠졌다. 전당대회 때문이었다.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휴가를 다녀올 새도 없었다. 모처럼 아내에게 여유가 생겼는데, 내가 더 바빠져서 너무 미안했다. 어느 날 밤늦게 들어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자기 파이팅 하고, 끝나고 우리도 실컷 파이팅! 하자고 ^^"

그녀의 응원 속에 다짐했다.

전당대회까지 끝난 뒤, 우리 둘의 아이를 갖자고.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자고.

함께 그런 계획과 다짐을 했다.


자연임신을 위한 많은 계획을 했다. 자연임신을 위해서는 많은 30대 중후반 남성들이 고민을 하고 노력을 한다. 그러니 나도 전당대회가 끝나고 많은 노력(?)을 할 생각에 자연스레 기대감에 젖기도 했다.


2022년 6월 말에서 7월 초쯤 되는 시기였다.

그날도 저녁까지 여의도에 있다가 밤에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아내와 기분 좋게 앞으로를 계획하며 하루를 끝내는 기네스 맥주 한 캔씩을 비워냈다.

우리 집에서는 유기묘를 데려와 키우던 노묘가 있었다.

동덕여대의 "슈스냥"(슈퍼스타 고양이)이라 불리는 '동양갱'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는 이름이 '원양갱'으로 바뀌었다.

그날은 즐겁게 우리의 미래를 넷플릭스를 보며 함께 기획하였고,

우리 집 고양이 양갱이는 그날 유난히도 냥냥 대며 안방으로 들어오려 했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나 우리의 첫 아이가 생겼다.

W의 임신을 알게 된 것이다.

W의 퇴사 후 2달 만이었다.

아이를 갖기 위해 우리 둘이 열심히 노력하자는 온갖 계획과 다짐을 하고 여러 계획들을 신나게 세웠었는데, 전당대회 끝나고 국회고성연수원 2박 3일 예약부터 여러 데이트코스를 다 짜놨는데,

그 계획들을 실천하기도 전에 이렇게 자연임신이 너무나도 쉽게 되다니.

왠지 모르게 엄청 허망했다.


일단 그리고 전당대회 중에 임신이라니, 뭔가 민망했다.

같이 메시지를 작성하던 P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같은 동년배 여성이었기에 이런저런 흉금을 터놓는 사이였다.


그리고 며칠 뒤, CBS <김현정의 뉴스쇼> 출연 수행을 갔을 때였다.

우리 후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참, 애 생겼다며? 축하해! 대단해!"


뭐가 대단하단 것인가...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그 순간 P의 가벼운 입을 10초 동안 원망했다.


마오쩌둥은 대장정 기간 허쯔전과의 동거에서 6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했던가.

그렇게 전쟁 중에도 아이는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전당대회의 마지막 연설문 제목은 '민주당의 미래'였다.

그 연설문을 위해 P와 함께 마지막까지 함께 연설문을 다듬었다.

고기를 구워 먹으며 후보가 나와 P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수고했어."

그 말을 들으면서 감사했지만, 나는 그 밤에도

그 좋아하던 돼지고기를 입덧 때문에 역해서 못 먹고 있는 아내 생각이 먼저 났다.


"다수이지만 사회적 약자인 사람들의 힘이 되는 정당"

"거대하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되는 정당"

그의 마지막 연설이 제시한 당의 미래 청사진이었다.


그 전당대회는 우리 후보의 패배로 끝났다.

우리 당의 미래는 잠시 멈춰 섰지만,

우리 집의 미래는 잘 자라고 있을 터였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바로 휴가로 떠난 국회 고성연수원에는,

패배의 씁쓸함과 새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동시에 안고 향했다.

핑크빛 기대를 갖고 갈 것으로 기대했던 국회고성연수원에

태중의 아이와 W와 함께 우리 가족 셋이 함께 갔다. 연수원 예약을 할 때만 해도 설마 셋이 갈 줄은 몰랐었다.

고성연수원에서는 이미 입덧이 한창 심해진 아내의 눈치를 보며 2박 3일을 보냈다.

정치적 패배감보다는 아내의 메슥거림 앞에 심기경호가 최우선이 되었다.


그리고, 자연임신을 위한 여러 계획과 다짐을 강도 높게 실천할 줄 알았던 그곳에서 나는 태몽을 꿨다.

내가 꾼 아이의 태몽은 빨갛고 빛깔이 좋았던 큰 사과가 나온 꿈이었다.


고성연수원 근처의 바우지움 미술관에서 데이트를 하며, 문득 영화 ‘킹메이커’가 다시 떠올랐다.

전당대회에서 '킹메이커'의 꿈은 일시적으로 멈췄지만, 나는 이제 전혀 다른 ‘킹메이커’가 되어야 했다.

내 아이가 자신의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킹'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

그 아이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는 능력 있는 후원자가 되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정말로 해내야 할 가장 위대한 킹메이커로서의 삶일지도 모른다.


정치라는 전쟁은 끝났어도, 우리 부부의 임출륙은 이제 시작이었다.

임신 기간 9개월 동안을 잘해야 최소 9년 동안 욕 안 먹는다고 누군가 내게 말해줬었다.

W의 임신 기간은 그 말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시간들이었다.


임출륙. 임신, 출산, 육아.

나에겐, 그리고 우리 부부에겐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은,

내 인생의 가장 큰 긁힘이면서 내 인생의 가장 단단하고 자랑스럽고 뿌듯한 커리어였다.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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