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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지키고 싶었던 직장 (2)

벚꽃은 지고, 또 다시 피어나리

by 유노유보

"... 오늘 오후 2시쯤에 전화를 받았어."

춥고 무거운 공기를 뚫고, 의원이 말하기 시작했다.

"나보고 하위 10퍼센트래."

의원은 엷고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

나는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위 10퍼센트라니... 20%도 아니고 30% 감산이었다.

3명의 후보가 나온 강북을에서는

1차 경선에서 70%를 득표해도 30%가 감산이니까 결선투표를 해야 하는.. 그런 페널티였다.

C 선임 보좌관은 이 사실을 먼저 들은 듯 침통한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이걸 미리 말해주는 이유는, 기자회견장 예약이랑, 내일 기자회견 메시지를 좀 다듬어야 돼서 그래. 대부분의 내용은 내가 직접 써놨어. 지금 좀 같이 메시지 톤을 조율해 보기로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내일 기자회견 전까지 모르게 해. 오늘 회식하기로 한 날이잖아? 내색하지 마. 야 초상났어? 다들 출근인사하고 퇴근인사하고 얼마나 힘들었어. 오늘 오랜만에 기분 좋게 즐겁게 회식하기로 했는데 내가 앞장서서 산통 깨면 쓰겠어? 경선 앞두고 박성재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청하느라 정책팀도 고생했고, 계속 박용진 tv 열일하는 홍보팀도 고생하고 다 고생하고 있는데 침울하게 먹어야겠어? 이거 업무지시야. 절대로 내색하지 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원과 마지막으로 거의 고칠 게 없던 메시지 톤을 조율하고, 미아동의 돼지고깃집으로 향했다.

소고기 못 사줘서 미안하다며 갈매기살과 항정살 삼겹살 목살을 골고루 시켰다.

의원은 전혀 침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녁 6시 51분에 페이스북에 저녁 회식 인증샷을 올렸다.

속 모르는 사람들이 거기에 "맛있게 드세요~", "힘내라 박용진~",

"의원님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필승을 위한 몸보신~",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등의 응원댓글을 달았다.

그 응원들이 무척 슬프면서도... 이 상황들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회식 때 고기 먹으면서 일부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했고, 웃었다.

그런데 나와 C 선임보좌관의 표정을 보고 그날 울산에서 놀러 온 모 인사가 말했다.

"아니 근데 보좌관님은 왜 이렇게 분위기가 쎄-해요? 좀 웃읍시다 웃어요.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그 덕에 분위기가 좀 더 풀렸다.

그분이 눈치가 없으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비서관들과 <살인자ㅇ난감> 드라마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이것이었다.

"애초부터 선택지는 없었다. 이번 생은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이니까. 아니다. 어쩌면 모든 게 내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답이 없다고 해도. 그리고, 이게 내 선택이다."


그동안 나는 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군주의 덕목, "비르투", "포르투나", "프루덴차" 중에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포르투나"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요즘 시국에 저 드라마의 저 대사를 보고 내 평소 생각이 깨졌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때로는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비르투"가 아닐까.


마키아벨리 또한 군주론에서 포르투나, 그러니까 "운명의 힘"의 중요성과 그 절대성에 대해 인정한다. 그러나 어차피 포르투나의 힘에 의해 우리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함과 용기, 바로 군주 자신의 "비르투"를 발휘하여 한번 운명과 최선을 다해 싸워보라고 이야기한다. 포르투나에 맞서는 과단성, 거칠고 대담하고 때로는 난폭한 도전만이 어려운 상황, 답이 없는 상황, 혹은 "정해져 있는 객관식"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그 비르투라는 것, 정치인의 덕성, 탁월함이란 결국은 "용기"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답이 없는 상황에서 이탕의 용기 있는 "선택"이 반전을 일으켰다.


정치란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답이 없는 상황, "이러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버렸다면, "으레 그러려니"하는 선택지들이 있다. 이탕의 말에 의하면 "객관식"일 것이고, 정치로 보면 "여의도 문법"일 것이다.


비서관들에게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말했다.

난 우리 의원이 "답이 없는 상황", "객관식"으로 뻔히 선택해야 할 것들이 보이는 상황에서

주관식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향한 그간의 길들이 그랬고,

정무위에서 교육위로 쫓겨났을 때, 모두가 외면했던 한유총의 문제를 잡아 끝까지 물고 늘어져,

마침내 20대 국회 끝나기 직전 버저비터처럼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을 모두 통과시켰던 유치원 3법까지.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 성과를 내는 반전을 만들어왔다고.

앞으로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답이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용기.

용기 있는 정치인 박용진과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순간이 내 인생의 전성기라고 생각하고,

"비르투"있는 정치인의 곁에 있을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비서관들에게 취해서 말했다.


"보좌관님? 보좌관님? 취하셨어요? 왜 안 하시던 장광설을 늘어놓으세요."

더벅머리의 L 비서관이 내 말을 끊으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 좀 취하긴 했어. ㅎ"


자유분방한 L이 있어서 우리 의원실 분위기가 살았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 술자리는 일찍 파했다.

밤 9시였다.


모두 헤어지고 난 뒤, 나는 또 다른 홍보비서관 W에게 전화를 걸었다.

"W야."

"네, 2차 안 가셨어요? 웬 일로 이렇게 끝나고 전화를..."

"내일 9시까지 촬영장비 챙겨서 소통관 기자회견장으로 좀 와줘요."

"네? 왜요? 어... 설마?"

"어. 기자회견해야 돼. W 비서관이 지금 생각하는 바로 그거."

"와.. 아니 진짜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요? 진짜, 와-술이 다 깨네. 아니 어떻게..."

"그러니까. 9시까지 챙겨서 기자회견장으로. L도 오라고 해서, 영상 다 남기고."

"... 네"


다음 날이 되었다.

"'과하지욕'을 견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당하지 않고 당에 남아 승리하겠다."

의원은 탈당하지 않고 국민의 삶을 지키는 정치를 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의외였다.

40년 넘게 강북에서 터를 잡고 산 의원이라면,

무소속으로 나갔다가 생환하는 것도 생각해 봄직한 일이 아니었을까?

저쪽 당의 H나 K도 다 그런 식으로 생환하고 언터쳐블이 됐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는 애초에 그런 수는 꿈도 꾸지 않았다고 했다.

윤석열 정권에 맞서 민주당의 총선승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의 경선 과정에서 살 수 있으면 사는 것이었고, 그러지 못한다면,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당원과 지지층에게 정치인이 해야 할 의무는

자신의 총선승리가 아니라 민주당의 총선승리라고, 의원은 말했다.

30% 감산이란 조건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민주당 의원은 역대 그 어느 누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의 시스템 안에서 승리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당원과 지지층을 향한 정치인의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진심이 통했던 것이었을까.

다행히 결선에 진출했다.

의원을 비롯해 다들 미친 듯이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나도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

특히 P는 거의 울먹여가며 제발 뽑아달라, 잘 부탁드린다고 연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가며 전화를 해댔다.


3월 11일, 경선 결선 결과는 저녁 8시 발표였다.

7시 20분에 K와 또 다른 K가 울고 있었다.

왜 울지? 싶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부정타게 울지 마시라고 내가 뭐라고 했다.

K가 나를 잠깐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자리를 옮겼다.

저녁 8시, 개표 참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14byte 정도의 짧은 문장이 텔레그램으로 공유되었다.


"... 죄송합니다."


우리 후보는 과반의 표를 얻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그 숫자를 압도하는 거대한 현실의 벽이 존재했다.

정치가 주는 환희와 절망은 늘 그렇게 한 끗 차이였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그저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그런 밤이었다.

그렇게 우린 경선에서 패배했다.

그것은 내가 취직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10여 년간, 드디어 가장 지키고 싶었던 직장을 찾았는데,

그 직장이 이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역사무실에 몰려왔던 사람들이 하나둘 조용히 티 나지 않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캠프에는 사람들이 끝나고 축배를 들자며 갖고 온 옛날통닭과 소주, 맥주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의원은 우리와 같이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여기저기 걸려오는 위로의 전화에 고맙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그런 말들을 해댔다.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하나둘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패배한 선거캠프의 쓸쓸함과 고독함이 우리를 감염시킨 감정은 절망과 체념이었다.


의원실은 이제 강북 출근을 끝내고 다시 여의도 국회로 출근했다.

경선에서 승리한 캠프들은 여의도에 오지 않았다.

총선 직전 여의도 국회에 남아있는 의원실은 모두 불출마했거나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실들 뿐이었다.

그 우울한 체념의 분위기를 난 견딜 수 없었다.

의원조차도 엄습해 오는 그 분위기에 전염된 듯했다.

그간 너무 고마웠다며, 의원식당에서 밥을 사주고, 시간 될 때 우리 같이 유행하는 <파묘>나 보러 가자고 했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다.

영화 파묘가 문제가 아니라 그때 J 후보의 과거 발언들이 파묘되고 있었다.

나는 심각한 사안이라고 봤지만, 의원은 "그래서 뭐 결과가 달라져? 승복해야지."란 투였다.

답답했다. 나는 이 직장을 너무 지키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나는 재심을 신청하자고 했다.

의원은 유보적이었다. 그걸 해서 과연?이라고 했다.

영화 <파묘>의 내용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의원은 영화가 끝난 뒤엔 선거 다들 수고했다며 다음 날 제부도에 MT를 가자고 제안했다.

그의 얼굴은 미소 속에 옅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니 지금 MT 갈 때인가...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때 가장 답답하고 화가 나는 사람은 의원이었다는 걸.

그래서 일부러라도 의연한 척, 보좌진들한테 그렇게 태연한 척한 것이었다.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파묘된 J의 과거 발언은 점입가경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느껴졌고,

그로 인해 파생된 다른 발언들도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여당에선 D후보가 5.18 망언으로 후보 자격이 박탈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강력하게 재심을 신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 시점의 뉴스에 따르면, J후보는 선거법 위반 이슈도 있었다.(현재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1심, 2심 당선무효형이 나온 상태다.)

이미 제부도에 MT는 와 있는데, MT에 와서 의원은 여기저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의원이 전화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화를 받는 쪽이었다.

제부도의 그곳이야말로 정신과 시간의 방이었다.

전화 한 통이 끝날 때마다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1분 1초가 슈뢰딩거의 고양이였다.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양자역학 상태를 의미한다.

제부도의 박용진도 적어도 그날만큼은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었다.

양자역학의 공천이었다.

다들 체념하고 회포를 푸는 상추쌈을 먹고 있을 때 난 혼자 불안하고 울화가 터지고 있었다.

그날 밤 9시 50분이었다.

"당 지도부는 J후보의 공천을 철회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진짜?!"

"와 이게 진짜예요 보좌관님?"

비서관들과 다른 함께 해온 이들이 저마다 외치기 시작했다.

난 의원과 C 선임보좌관에게 말했다.

"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요!! 지금 MT 올 때가 아니었다니깐!"

화를 내면서 웃는, 지금 생각해도 기묘한 모습이었다.

의원은 침묵을 지켰지만, 결국 재심신청서를 내기로 결정했다.

졸지에 MT 와서 술 잔뜩 마신 채로 일해야 했다.

다행히 D비서관이 가져온 무거운 H컴퓨터 노트북이 있었다.

힙함과 거리가 멀었지만 H컴퓨터 브랜드답게 성능은 좋았다.

박용진 의원실의 올드한 취향에 따라 기네스 맥주가 아니라 카스에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같은 '쏘맥'과 고기를 먹은 채로, 정신을 가다듬고 글을 써야 했다.


흥분해서 밤 11시 30분에 최종컨펌이 안된 채로 메시지를 냈다가 급하게 취소시키고 기자들에게 죄송하다는 전화와 카톡을 연신하는 등 정신이 없었다.


아침이 되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재심신청 최종을 준비하기 위해 나와 C선임보좌관, 의원 등 몇몇만 의원실로 다시 향했다. 나는 사무국장이 코를 골아 3-4시간밖에 못 잔 상태에서 세수도 대충하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 채였다.


그렇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체할 수 없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때 당시엔 이미 J의 과거 발언 외에 예비후보 자격심사 과정에서 걸러져야 했던 '7대 결격사유' 중 하나인 '가정폭력 전과이력'도 보도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재심신청 취지의 화력을 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러 곳의 자문을 얻고, 재심신청서 최종본을 마침내 당에 제출했다.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기다렸다. 나름의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면서.

진인사대천명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는 공인노무사 수험 시절 늘상 느낀 일이었다.

당시 공천 국면에서 난 내가 할 일은 진짜 다 했다고 지금도 자부한다.

그래서 후회는 없었다.


재심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의원에게 전화가 왔다.


난 기대에 부풀어 전화를 받았다.

"의원님, 어떻게 됐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옅은 한숨을 쉬며 의원이 말했다.

"...기각이래."

"..."

"최고위원회가 열린다는데, 뭐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알겠습니다."

"일단 기다려보자. 우리는 할 일 다 잘했고, 정말 최선을 다 한 거야. 그리고 어제오늘 유 보좌관 정말 순발력 하며 논리며 언론공보대응 정말 놀라웠고 대단했어. 훌륭해. 훌륭했어. 감사하고 고마웠어. 이렇게 한번 확 어떤 대전을 치러보면, 뭔가 막 세상이 이렇게 탁 내 마음처럼 움직이는 이런 느낌도 있고 그래. 서로 탁탁 탁탁 비슷한 느낌 갖고 손발 맞춰갖고 하면 기분이 참 달라져. 오늘 내가 과거에 대변인단에서 그렇게 작업해 오던 느낌 이후로 오랜만에 너와 같이 하면서 그런 걸 느꼈어. 오늘 좋았어. 고생했고, 너무 고마워."

"... 그럼 일단 최고위 기다려야겠네요."

"일단 그러자. 지켜보자고."

"... 네"


전화가 끊기고, 가슴에서 뭔가가 탁 맥이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를 재우고 잠들었던 W가 갑자기 그때 깼던지, 나를 안으며 말했다.

"자기야. 왜 그래. 자기야. 울어? 아이고..."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말 놀라웠고 대단했다.', '고생했고, 고마워'란 말.

평온하고 건조한 그 말들이 유독 그렇게나 서러웠다.


최고위의 결론이 나올 새벽까지, 나 혼자 방에 틀어박혀 눈을 감고 그린데이의 노래를 계속 틀어놓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오고 있는데, 나의 9월은 끝나지 않고 악몽은 계속되고 있었다.

"착한 자는 항상 일찍 죽고 만다."

"innocent"라는 영어 단어가 계속해서 내 귓가를 맴돌았다.


다음 날 확인한 최고위원회의 결론은 "전략경선"이었다.

우리가 후보가 되려면, 감산 30%가 그대로 유지된 상황에서 경선을 치러야 했다.

강북을 당원과 전국 당원의 투표로.

상대 후보는 여성후보였던 Z로 결정이 되었다.

그는 여성 가산점 25%를 받게 되었다.

Z는 후보가 되자마자, 유튜브에 나가 "(박 의원이) 바보같이 경선에 응모하시겠다고 했는데, 이왕에 바보가 되실 거면 차라리 본인이 밀알이 되어 썩어 없어지는 헌신을 보여줬으면 한다"라고 발언했다.


하나마나한 경선이었다.

강북을의 우리 지지층은 전의를 상실해 투표를 포기했다.

우리가 이전에 받았던 표보다 10% 정도 더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경선 '룰'의 무서움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의원은 Z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건넸다. 이후 지방의원들 상견례 일정을 잡는 등, 지역위 인수인계 작업을 시작하려 했다.

공천장을 받은 Z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서 나는 많은 감정이 들었다.


의원은 의원실 식구들 그간 다 수고했다면서

전략경선이 끝나고 한 1주일씩 돌아가면서 휴가를 쓰라고 했다.

아내와 같이 스타벅스 카페에 앉아서 남들 다 일하는 오후 4시에 드라마, <대군사사마의>를 봤다.


옥에 갇힌 조비를 사마의가 빼내는 장면이 마침 눈에 들어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조비가 감옥에서 나오면서,

"저 문을 넘어서면 난 세자가 되는 것이오?"

하자 사마의가

"한 걸음 더 가까워지셨습니다."

라고 하는 순간,

갑자기 또 눈물이 나왔다.

의원이 나한테 정말 대단했고 고맙다고만 그런 말만 안 했어도 별생각 없었을 텐데.

나의 무능이 그를 구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다른 유능한 사람이 작년에 의원의 보좌관으로 왔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나는 왜 사마의처럼 끝내 그를 구해내지 못했을까.

지난 수년간 긁힘을 연료 삼아 여기까지 달려왔고,

이제는 어떤 부조리에도 맞설 수 있는 작은 무기 하나쯤은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그 무기가 거대한 성벽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너무나 압도적인 현실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훗날의 역사가들이 이를 다 어찌 알겠습니까."

라는 사마의의 발언에 이르러, 나는 다시 소리 내어 울었다. 드라마 속 사마의가 미칠 듯이 부러웠다.

아내는 평일 대낮에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중국 드라마만 계속 보다가 갑자기 통곡하는 나를 보고 당황해했고, 이내 토닥이고 안아줬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Z의 과거 성범죄 재판 수임과 당시 변론이 문제 되기 시작했다.

한번 문제가 터지자 성범죄 외에도 그의 경력과 상충된다는 느낌을 주는

여러 민생경제 범죄에 대한 과거 재판 수임과 변론에 대한 보도가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보등록 마감일을 앞둔 새벽이었다.

"Z후보 자진사퇴"


우리 의원실 사람들은 밤늦게 이 어이없는 상황들을 뜬눈으로 지켜봤다.

W비서관은 "와 영화도 이렇게 만들면 욕먹는다."라고 인스타스토리를 올렸고,

여의도 최고의 에이스 K 비서관은 "아 이게 뭐예요 진짜! 하루 만에 다 준비해야 되네!"라고 하면서

혹시 모르니 후보등록서류를 챙겨둬야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의원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길했다.

후보등록 마감을 7시간 정도 앞둔 그때, 당에서 H후보의 공천을 발표했다.

아, 의원이 내 전화를 안 받은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울 강북구 을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그렇게 서울 송파구 주민 H 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이런저런 공천논란 때문에 총선에서의 수도권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의원은 늘 총선승리를 당원과 지지층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정치인은 거기에 복무해야 한다고 봤다.

나 같으면 그냥 잠수 타고 쉴 텐데, 의원은 험지로 가서 지원유세를 간다고 했다.

"내가 계속 부르짖은 게 총선승리인데, 혹여나 내 공천 논란 때문에 우리 당이 지거나 하면 안 되잖아."

본인은 멈춰 섰지만 당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조였다.


그 1주일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가 상을 치렀다.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대통령은 "전공의 파업 관련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었다.

사실상 총선은 그때 끝난 것이었다.

그걸로 당의 압도적 총선승리는 거의 확실시됐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9월도 그렇게 끝나갔다.


의원의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국회의장실에서 우리 의원실에 연락이 왔다.

의원님께서는 제4회 대한민국 국회 의정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개원 76주년 기념식에 참석해달라는.

의원은 입법활동 우수의원 경제산업 부문에 뽑혔다.

국회 의정대상 수상자를 추려보니 전체 25명이었다.

300명 중 25명. 전체의 8.3%였다.

우리 의원이 300명 전체 국회의원을 통틀어

상위 10퍼센트 이내의 우수한 의정활동을 해온 것에 대해,

적게라도 일익을 담당해서 자랑스러웠다.


의원은 임기 마지막 날 페이스북에

"국민 여러분 덕분입니다. 강북 주민 여러분 덕분입니다.

유능하고 멋진 보좌진 여러분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말을 남겼다.


총선이 며칠 안 남았을 때, 이제 막 돌이 되려는 아이와 아내와 같이 여의도 벚꽃놀이를 했다.

국회 사랑재 근처 벤치에 앉아서 W와 함께 1년 전을 회상했다.

딱 1년 전 이맘 때에도 출근을 했었다.

그때는 대정부질문 준비때문에 주말출근을 했다.

그 와중에 만삭의 아내와 벚꽃 조금이라도 같이 보겠다고 그때도 꽃구경을 했었다.

그렇게 우리 세 식구가 1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꽃구경을 하게 되니, 만감이 교차했다.

아내는 그렇게 여러 생각에 잠겨 있는 나의 모습을,

아기띠로 함께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과 함께 스마트폰 사진에 담았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떨어진 벚꽃잎을 말없이 툭 털어냈다.



의원실에서의 생활이 항상 행복하진 않았다.

그래도 보람과 즐거움이 함께 했다.

마치 우리 부부의 임신과 출산, 육아처럼.


이곳에 있을 때 아이가 생겼고,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키웠다.

흐드러지는 벚꽃이 유난히 아쉬웠다.


봄꽃축제는 끝났지만, 꽃은 곧 반드시 다시 필 것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내 직장의 마지막 지금 이 시절이야말로,

우리 아이의 미래만큼 밝은 우리들의 앞날을 머금고 예비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내와 아이와 함께 그 주말에 여의도를 걸으며,

나는 쓸쓸함보다 다짐이 더 많은 감정에 젖어들었다.

아내가 내게 말했다.

"벚꽃보다 자기 얼굴이 더 활짝 폈는데? 내년 벚꽃은 더 예쁠거야. 그때는 우리 셋도 더 활짝 웃고 있을 거야."


사람과 집단에 대한 상처가 가득했을 때,

우리가 서로 이렇게 만나

아무것도 아니었던 때를 함께 거쳐오면서 어느덧 이렇게 많은 결실을 맺어오고 있었다.


독하게 마음먹길 수년,

어느새 우리의 상처는 우리의 성과를 만들어낸 원동력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서로 함께 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우리의 지나온 상처들에 감사했다.

그들에게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늘 뼈로 아로새기며 살아갈 것이다.


직장은 끝내 지켜내지 못했지만,

우리의 미래만큼은 지켜낼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꽃을 바라보며, 꽃잎들을 밟고 거닐면서

내 아내와 나, 우리 둘에게 무한한 뿌듯함을 느꼈다.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했던 그 노을이,

유독 아름다웠다.

W와 내 아들의 빛나는 미모와 미래처럼.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회사명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었으며, 특정 개인이나 법인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나 법인,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특정 상황이나 대화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일부는 작가의 기억과 해석, 창작이 반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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