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현정(破邪顯正)’에서 ‘인자무적(仁者無敵)’으로
"참을 인 10번은 쓰고 살아야 해요"
박용진의 이 발언이 대선 국면에서 일부 커뮤니티의 당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됐을 때, 난 의아했다.
그 발언은 계엄 이후 달라진 그의 태도, 당원과 지지층을 향한 그의 자세를 응축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발언의 진의는 지지층이 아니라 C를 향한 힐난이었고,
대의를 위해서는 몇 번이고 '나'를 앞세우지 않겠다는, 스스로를 향한 선언이기도 했다.
총선이 끝난 후, 의원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다음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의 다음이 아니었다.
슬픔에 잠긴 우리에게,
"야,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국회의원 걱정이랑 연예인 걱정이야."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의원실 보좌진들의 다음이었다.
총선이 끝난 뒤, 여의도 회관에는 소위 '비명계' 의원실 출신은 다음 취업이 어렵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우리 당과 당대표가 그런 지침을 내릴 리는 없었지만, 생계가 걸린 일에 보좌진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원은 보좌진 한 명 한 명에게 앞으로 뭐 할 거냐고 진로를 물어본 후, 계속 국회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 사람들의 이력서를 받았다. 그리고 어울릴만한 의원실을 함께 물색해 주고, 필요하다면 "이 사람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번 면접 보셔도 괜찮을 거 같다고 당선인들에게 추천을 해줬다.
당선인들도 여기저기서 그런 부탁을 많이 받았을 테지만, 다행히 한 명 한 명 면접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2024년 5월 30일,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박용진 의원실 출신들 중 국회에 남기로 희망한 사람들은 모두 재임용됐다.
나는 22대 국회 최고령 의원이었던 P의원의 선임비서관으로 재임용이 되었다.
P 의원실로 첫 출근했을 때였다.
DJ와의 추억과 업적이 서려있는 여러 그림과 사진들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중에는 DJ가 친필로 써주신 4글자 사자성어 현판도 있었는데, 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자○적..
세 번째 글자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로 의원실을 다녔다.
회관 의원실로 첫 출근을 하고 퇴근하기 직전에, P의원의 선임보좌관이 감정에 복받쳐 말했다.
"이 방에 4년 만에 왔다는 게 믿기질 않네. 마치 어제 퇴근하고 오늘 출근한 거 같아!"
P의원은 21대 국회 때는 의원이 아니었다.
이번 대수에 20대 국회 때 있던 의원실을 그대로 다시 배정받은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지금은 다른 당의 차지가 된 국회의원회관 428호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리고 감격해하는 그 선임보좌관이 미치게 부러웠고, 슬펐다.
22대 국회의 법사위는 폭풍과도 같았다.
야당은 여당을 정신없이 몰아쳤다.
분위기 탓도 있었지만, 나도 전에 없이 열심히 했다.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 나를 추천한 사람을 욕보이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방송사 단독과 언론보도를 자료요구와 여러 직간접적인 탐문과정, 때로는 언론인과의 협업을 통해서 만들어냈다. 원래부터 언론 프렌들리 한 P의원의 후광 때문도 있었다.
P의원의 대중적 이미지는 누구보다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 이미지지만,
곁에서 본 P는 그 누구보다도 필요한 말만 간결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본인의 속내와 실제 판단을 언제 말하면 되는지 또는 말하면 안 되는지를 정확히 캐치하는 분이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철저하게 맞춤형 대응을 하는 분이었다.
박용진 의원은 어떤 의제나 보도 거리가 생기면 함께 뛰어들어 밑그림부터 완성해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 귀찮게 느껴질 수 있는 업무스타일이었다.
P 의원은 일단 한번 맡기면 중간 확인만 하고 철저하게 보좌진에게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다른 리더십이었지만, P의원을 통해서도 배워가는 것이 있었다.
중진 의원이었던 만큼, 무리한 민원이나 요구도 훨씬 많았다.
단호히 거절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아무리 이상하기 그지없는 민원일지라도 문전박대는 하지 않았다.
잦은 야근으로 맞벌이임에도 독박육아를 하게 된 아내의 불만이 다시 극에 달하고,
아들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볼 때,
(그리고 늦게 퇴근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도 느껴졌다.)
퇴사할 각오로 의원에게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P 의원은 내게 짧게 말했다.
"알았어. 육아는 무조건 First니까 ㅇ(선임보좌관)이랑 상의해서 근무시간 조정하도록 해."
합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따지지도 않고 들어주는 분이었다.
대선이 당의 승리로 끝난 후 시간이 지나 의원실을 떠나겠다고 말한 날,
P의원은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법사위에 괜찮은 사람 추천 좀 하고 나가. 네가 볼 때 안 괜찮아 보여도 추천해.
어차피 너보다 괜찮은 사람 지금 법사위에는 없으니까."
그 말이 비록 덕담에 불과할지언정, 잔잔한 감동이 있었다.
이제 내 사회생활에서 더 이상의 인정투쟁은 무의미했다.
나란 사람 스스로가 역량의 증명이었다.
P 의원실은 떠날 때가 아름다웠던 나의 첫 직장이었다.
P 의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서면서,
문득 편액에 있던 인자○적의 세 번째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한자는 없을 無의 약자였다. 无.
仁者无敵.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다.
내가 느낀 P의원의 인품과 성격을 압축시킨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의원들은 다 자기 성격에 맞는 사자성어를 사무실에 걸어놓는 것 같았다.
박용진 전 의원의 사무실에 있을 때,
내가 본 편액은 "破邪顯正파사현정"이었다.
"사악한 것을 깨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퇴사를 선언한 그 순간에, 박용진이란 사람이 떠올랐다.
그가 다시 정치의 최전선에 나선 것은 몇 달의 휴지기를 거친 2024년 12월이었다.
12월 3일, 천지분간 못하는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가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여의도를 가지 않다가 계엄령이 터지자 무작정 국회 앞으로 갔다고 했다.
알고 봤더니 그 당시 대입을 치른 자제분도 국회 앞에 가서 계엄군을 막기 위한 시위를 했다고 하더라.
나중에 내게 그때 일화를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방송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전까지 몇몇 사람들이 왜 국회에 안 들어가고 이러고 계시냐고
자꾸 채근했다고 했다. 본인도 웃퍼서 그냥 멋쩍게 웃었다고만 했다.
탄핵이 될 때까지 의원은 계속 국회 앞의 탄핵촉구 집회에 참석했다.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 대통령의 탄핵은... 이재명 대표의 대통령으로 가는 길의 8부 능선을 넘는 길이기도 했다.
의원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미치광이 정권을 빨리 끝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게 우리 당원과 지지층의 바람인 것도 의원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계엄 저지와 윤석열 탄핵 정국에서 의원은 뭔가를 결심한 듯 보였다.
그중 한 장면이 이재명 대표와의 만남과 독대였다.
이재명 대표로부터 오찬을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고, 흔쾌히 만나자고 했다.
그는 몇몇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내게도 의견을 물었다. 언제 만나면 좋을지.
나는 첫 번째 아니면 마지막이 좋을 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는 어차피 대표가 되는 시간에 만나야 되니까란 말과 함께 이재명 대표가 만나기로 한 여러 사람 중 제일 첫 번째로 오찬을 가졌다.
이재명 대표는 박용진을 향해 "지금의 위기상황에 박용진의 역할이 있을 거고, 앞으로 더 큰 역할을 같이 만들어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손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아 저도 힘들다. 박 의원도 가슴 아플 것을 안다."라고 말하며 악수했다.
의원은 인터뷰에서 "민주당을 바라보는 국민들에게 안심이 됐으면 한다. 총선은 저에게 모진 기억이었지만, 내란 추종 세력의 기득권 저지에 힘을 합쳐야지, 대의명분 앞에 사사로운 개인감정이 자리할 순 없다고 본다."라고 했다.
공개된 인터뷰가 끝난 뒤에 나도 궁금해서 물어봤었다.
혹시 서울시장 이야기는 하셨냐고.
의원은 '너도 그런 소리하냐'는 듯한 눈으로 내게 말했다.
"그런 얘기 안 했어. 야 무슨 내가 거래하러 나갔냐 그 자리에? 화해하고 힘 합치러 나간 거지?"
이재명 대표의 통합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듯이, 박용진도 통합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다.
두 정치인의 오찬 자리에는 "거래"는 없었고, 당원과 국민을 향한 "책임감"만 있었다.
정치인들의 마음이란 참 힘들고 크구나.
의원은 간절히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2심 무죄를 바랐다.
대선 경선에 출마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부총질'프레임이 더 이상 없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2심 판결이 나오기 전에도 이재명 대표의 대선출마에는 "무죄추정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원칙이기도 했지만, 내란종식에 잡음이 없어야 한다는 그의 진심도 있었다.
2심 무죄가 나오고, 의원은 곧 있을 대선 경선 출마에 대해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불출마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사람들도 대동소이했다.
탄핵은 박근혜 때와 마찬가지로 8대 0 전원이 인용결정을 내릴 것이었다.
그는 출마 여부를 묻는 회의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데 "통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계엄"이란 전무후무한 역사적 대죄를 끝장내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정치인으로서의 의무이고 당원과 지지층을 향한 예의라고 말했다.
그리고 탄핵이 되자마자 그는 입장을 발표했다.
"경선후보가 아닌 평당원으로 국민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라고.
그가 당시 본인이 계엄 이후에 결심한 게 있다면서 내게 말해준 게 있었다.
"더 이상 옳은 걸 옳다고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사람들이 옳은 사람 말보다 좋은 사람 말 듣는다는 말이 있잖아. 정치하는 사람이 불편하고 분노하는 사람들 시선 묵묵히 감당하는 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 사람들 마음 알아주고 품어주고 보듬어주는 것도 정치인의 역할이지. 내 당면 과제 중 하나는 우리 당 지지층의 마음을 보고 함께 하는 거야."
지지층의 마음과 함께 한다...
P의원이 자신의 속내와 실제 판단을 말할 때 늘 조심스럽게 때를 보면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겹쳐졌다.
그렇게 하려면 박용진 의원은 늘 먼저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한 번쯤은 참아야 했다. 선제적으로 소신을 밝히기보다, 좀 더 지지층의 마음을 살피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발언하고 메시지를 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게 당원과 지지층의 마음을 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와중에 유튜브에서 C의원과 만나서 토론하다 그 사달이 난 것이었다.
"개딸 맛을 덜 봐서 그래요"라는 C의원의 말에,
박용진 의원이 "참을 인 10번은 쓰고 살아야 해요"라고 말한 뜻은,
개딸이, 당원이 고까워서가 아니라,
C 의원을 향한 냉소적 반박에 가까웠다.
정치인은 참을 인 10번이라도 새기면서 지지층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만 외치는 건 진정한 정치인의 태도도, 동지의 태도도 될 수 없다는.
(내가 물어봤을 때도 그런 의미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당원과 지지층 커뮤니티엔 그걸로 "박용진 또 본색 드러냈네" 등의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옛날 같으면 미동도 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라져 있었다.
그의 SNS에 당원과 지지층에 "오해를 불러일으켜 죄송하다"는 취지의 해명문을 썼다.
그런 소통의 모습이 바로 박용진이 말한 "참을 인 10번"의 의미였다.
그가 지지층과의 화해를 시도하고자 한 것의 또 다른 모습은,
그가 <다시 만날 조국>이란 영화에 출연한 일이었다.
그건 나로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에게 J사태는 불공정과 내로남불의 악몽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의원은 내란종식과 검찰개혁에 조국혁신당도 같은 길에 동참하고 힘을 합쳐야 하는 것이고,
J에 대한 비판은 비판이고 검찰개혁의 필요성은 필요성 아니냐.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했던 말이 당시에 옳았든 그르든, 내가 당시에 했던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내 말의 일부가 우리 진영을 향한 화살이 되어 날아간 것, 언론보도로 그런 것이 악용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지지층에게 솔직히 인정하고 그 마음을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영화를 봐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글에도 썼다.
"조국혁신당 당원동지"들이라고.
나로서는 충격적이었지만,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는가.
"마음"에 상처를 주면 옳은 것에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의원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지지층의 "마음"을 보기로 한 것은 아닐까.
의원은 계엄 이후
파사현정의 성정에 인자무적의 마음을 두르기 위해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그는 대선 때 이재명 후보의 직속위원회,
"사람사는세상 국민화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열심히 뛰었다.
마침 일요일이었던 어느 맑은 날,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3가족은 나란히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사람사는세상 국민화합위원회 정책협약식에 참석했다.
의원이 외쳤다.
"내란종식과 정권교체가 제일 중차대한 과제인데, 진짜 대한민국을 시작하는데 비명과 친명이 어디 있겠나"
그 말은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다.
의원은 이재명 후보가 성군이 될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쓸모있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언젠가 그 혼자 무알콜 맥주를 마시던 어느 술자리에서 그가 "얄미울 정도로 실용주의자인 이재명 후보가 정말 잘할 것이고 설령 누가 사고를 쳐도 금방 수습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래서 그 말들이 진심이라고 느꼈다.
의원은 "혼자 하는 정치", "혼자 옳은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소신을 지키는 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소신을 남들에게 설득시키는 일이라고.
아마도 그것은 의원에게 "과거의 박용진"을 조금은 버려내는 과정이 될 것이기도 했다.
그건 아마 미래의 박용진이 언젠가 얻을 승리를 준비하는,
오늘의 박용진이 몇 번이고 맞이할 가장 찬란한 패배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사실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의원의 그 말들에서 내 과거의 모습들을 반추하게 되었다.
대선은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이재명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다.
박용진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 선거에 기여하였다.
총선 과정의 앙금과 모진 감정을 뒤로하고,
당원과 지지층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했다.
그것이야말로 마음속에 참을 인 10번을 새기고 또 새기는,
지지층이 원하는 내란종식과 통합이란 역사적 사명에 복무하기 위한 가장 찬란한 패배였다.
그리고 그 3달 후,
나 역시 나의 찬란했던 패배의 현장이었던,
이제 3년 6개월의 시간을 보낸 여의도 국회를 떠나있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