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침반, W의 이야기
국회를 떠나기로 결심한 뒤, 나는 아내의 사무실 한쪽에 내 자리를 마련했다.
사무실 내 방에서 조용히 음악을 틀었다.
W의 2집, <Where the story Ends>의 2번 트랙, <Shocking Pink Rose>.
노래를 듣다보니 문득 처음 이 글을 쓰게 했던 '긁힘은 나의 힘'이라는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문장을 나는 이제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 대림의 한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태어난 W의 가정은 몇 번의 이사 끝에 서울 가양동의 영구임대아파트를 거쳐 강서구 등촌주공6단지에 자리잡았다. 임대아파트 1층에서 살았던 그녀는 가끔 웃으며 자신을 “30년 경력 엘사”라고 말했다. LH주공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그 혐오 표현을,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일부로 끌어안고 있었다. 「둔촌 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를 읽고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 있었다. “‘둔촌주공키즈’랑 ‘등촌주공키즈’랑 한 글자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그 한 글자가 진짜 천지 차이야.”
그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때도 “저 집은 17평이네”, “저 집은 11평이네”, “저 집은 임대네”, “저 집은 분양이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지만 다 엇비슷하게 못살았다.(그땐 전용이 아니라 공급면적을 갖고 17평, 11평 운운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전거(전세거지)나 휴거(휴먼시아 거지), 엘사(엘에이치 사는 애) 등의 엇비슷한 혐오표현은 없었던 동네. 1학년 아이에게 한줄로 못선다고 싸대기를 날리던 선생, 물건 하나 훔친 아이 두명을 1교시부터 6교시까지 각목과 실로폰대로 사정없이 패던 선생, 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조그만 잘못에 그렇게 얻어터지는데, 그 잘못 때문에 학교에 찾아와 그저 빌기만 했다고 했다. 그때도 W는 “왜 내 아이한테 이렇게 심하게 하냐고 말을 못해? 다른 동네에서도 이럴까? 이 동네가 못 살아서 선생들이 이러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엔 관심이 없었지만, 어릴 땐 그렇게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사는 동네는 좀 바꿔보고 싶었다고. 신기하게도 내가 국회에서 알게 된 한 기자도 등촌주공 출신이었는데, 그녀와 거의 똑같은 말을 했다. 그녀는 구청장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동네를 너무나 바꾸고 싶었다고. W는 나처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악착같이 잘 살아 보이겠다나 복수하겠다는 마음보다는, 그저 자기 주변 사람들, 같이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이 조금은 더 나아졌으면, 좀 더 괜찮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를 통해 수많은 편견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가령, 나는 자사고나 특목고가 교육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나쁜 제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반문했다. 자신이 다닌 민사고가 아니었다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결코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었을 거라고. 3년간 기숙사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형편 어려우면 전액장학금까지 줬는데, 왜 이걸 오히려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공격하고 학교를 없애지 못해서 야단인지, 이것만큼은 공감하기 어렵다는 그녀의 항변에 나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법고시 시스템에서는 학원비 때문에 엄두도 못냈던 게 변호사의 꿈이었다. 전액 장학금은 물론이고 생활비 장학금까지 주는 로스쿨 제도를 통해 변호사가 된 그녀를 보며, ‘로스쿨은 부자들의 계급 재생산 창구’라고 생각했던 나의 얄팍한 편견도 깡그리 깨졌다.
그녀가 육아휴직은 커녕, 출산휴가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할 때, W와 나는 함께 분노했다. 노무사로서 참을 수 없다고 노동청에 고발해서 변호사님 좋아하시는 “법”대로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하는 나를 W는 말렸다. 그녀는 그보다는 사직해서 개업을 하는 길을 택했다.
내가 한창 국회에서 바쁠 때, 그녀는 공유오피스에 1인 사무실을 열었다. 직원도 없이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1인 개업 변호사였고, 그와 동시에 이제 갓 100일 된 아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였다. 일이 잘 되어 수임이 늘면 기뻐하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에 늘 반복적으로 우울해했다. 일이 해일같이 밀리면 감정의 쓰나미가 나에게 몰려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더 잘하겠다고 다음 주에는 정말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겠다고,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그녀가 피해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구조사건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나는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을까! 나는 왜 일도 하고 싶고 아기한테도 다 잘해주고 싶고! 그런데 체력은 안되고! 진짜 한탄스럽다 정말.” 이런 류의 푸념을 했고, 나는 육아에 대해 더 많이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아등바등 버텨낸 끝에,
올해 그녀는 요새 한창 뜨고 있는 서울 마곡 지구의 이대서울병원 맞은 편에 번듯한 사무실을 얻었다.
직원도 새로 뽑았다.
나의 여름휴가 때, 그녀가 내게 제안했다.
“몸과 마음이 지쳤으면, 이제 우리 사무실로 와. 나랑 같이 육아하면서 일하자. 돈을 얼마 벌든 상관없어. 사실 난 자기가 육아를 좀 더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 방 하나 내줄게. 노동법률사무소 공인노무사랑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같이 일해보는 거 어때?”
나는 오래전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로가 서로의 사회안전망이 되어주자고. 내가 직장병행 수험생으로 월급을 받으며 버텼기에 그녀도 로스쿨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고맙고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나는 “사회안전망” 드립을 치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내가 자기한테 3년 투자해서, 앞으로 30년 넘게 배당금 받아먹을거야. 내가 대학동의 워렌버핏이야.”
그 우스갯소리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최고의 우량주에 투자했고,
이제 그 배당금을 받을 시간이었다.
올해 2월, 우리는 ‘신생아 특례 대출’ 덕에 집을 샀다. 대출금은 4억 7천만원이었다.
강서구 등촌동 영구임대아파트 1층에 살던 W와,
대전 신탄진의 허름한 빌라에서 유년기를 보낸 내가
우리 명의의 서울 구축 아파트 한 채를 갖게 됐다.
인테리어까지 끝나고 이사한 뒤 1주일 만에 터진 누수 문제까지 수습한 뒤에, 아이를 재우고 생각했다.
적어도 우리 아이는 우리 둘과 조금은 다른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아이가 4월생이었기에, 신생아 대출이 막히고 축소되기 직전에 집을 살 수 있었다.
천행이었다.
대선 이후 이런 형태의 대출이 막힐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아들 덕에 우리 부부는 30대를 다 보내기 전에 서울 목동의 전용 84 아파트에 등기를 칠 수 있었다.
W는 개업 이후 자신의 모교인 D초등학교 변호사 명예 교사가 되어 진로 특강을 나갔다.
그리고 강서구 자신이 살던 곳 근처의 지역아동센터들이 강연 요청을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갔다.
돈도 안 되는 그 일을 바쁠 때는 안 나가도 되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 동네 아이들은 어려운 친구들이 많아. 자기들끼리 '전 엘사에요', '우리 아빠는 기생수에요' 같은 말을 해.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답을 잘 안 해. 꿈도 대답 안하거나 별로 없다고 그래. 그 아이들한테는 롤모델이 없는 거야. 공부를 안 하는 건 걔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내가 더 잘 알아. 그럴 때 내가 그냥 나를 보여주고 싶어. '나 여기 학교 나왔고, 이 동네 살았다. 너희가 말하는 엘사로 30년 살았다. 근데 나 민사고 갔고, 서울대 로스쿨 나와서 변호사 됐다. 나 너희 주변에 늘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이런 나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그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롤모델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바빠져도 나는 계속 갈 거야. 내가 동네를 바꾸지 못했지만, 내가 이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뭔가를 돌려주고 싶고, 기여하고 싶어서 그래."
W는 별 생각없이 평범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웬지 코가 찡해졌다.
사실 나의 노력 대부분은 인정투쟁의 산물이었다.
나를 긁어왔던 이들에게 똑똑이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원동력이었다.
그게, “긁힘은 나의 힘”이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W의 동력은 달랐다. 동네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 자신이 살았던 동네를 바꾸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본인이 나서 동네의 아이들을 바꾸고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그의 동력원이었다.
P의원의 말이 뭉클하게 다시 생각났다.
“너보다 못한 사람이라도 추천해. 어차피 너보다 잘하는 사람 법사위에 없으니까.”
그 말로 나의 인정투쟁은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에겐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줬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아내의 말은 그런 고민에 휩싸인 내 머리에 그야말로 깊은 울림을 줬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정투쟁이 끝나고,
남들 보기에도 괜찮은 삶과 커리어를 이뤄낸 지금,
당분간은 아내와 함께 과거의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작은 롤모델이 되어주고 귀감과 영감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했다.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삶,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쌓아온 노력과 경력의 진짜 이유일 것이다.
이 글을 3년 6개월여의 시간을 보낸 국회를 떠나,
각기 서로 다른 시간을 비추며 함께 해왔던
나의 아내 W의 사무실 한쪽에서 마무리한다.
키보드치는 걸 잠깐 멈춘 뒤,
W의 사무실에서 W의 노래를 들으며, 값을 따질 수 없는 그녀의 미소를 바라봤다.
국회를 떠난 우리 가족의 삶은 다른 이들과 함께 빛날 것이다.
W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