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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란현 작가 May 29. 2023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오늘'도 정리해 본다

아침부터 비상이다. 노트북을 올려둔 책상 아래 머리카락, 뻥튀기 흘린 거, 벗어 둔 양말을 모두 없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책상 아래에 있다. 책상 위엔 어제저녁에 마신 음료 캔과 우유팩, 커피잔도 있다. 대학원 과제용 책, 독서교육컨설팅 용 동화책, 서평단 책, 읽어야 할 원고, 출장 가서 토론할 책. 플루트 악기까지 올려두었다. 80센티미터 두 개의 책상 위엔 물건이 가득하다. 

베란다 물건도 줄여야 한다. 막내 희윤이에게 버릴 장난감을 고르라고 했다. 이웃에게 물려받은 옷 중에서 희윤이에게 큰 사이즈는 버렸다. 겨울옷을 버리고 나니 베란다도 옷장도 숨통이 트였다. 

싱크대에는 페트병이 가득하다. 큰딸 희수방에서 나온 페트병만 비닐봉지에 가득 찬다. 싱크대 위에는 라면, 건강식품, 냄비 등 모든 게 가득하다. 주변 200센티미터 3단 책장에는 희윤이 마스크, 지퍼백, 차 키, 커피 등 뒤죽박죽이다. 싱크대 상부장에 비닐팩은 넣어두었다. 설거지는 속도가 나지 않는다. 포기다. 일단 바닥부터 청소기를 돌린다.

쪼그리고 앉아 욕실 바닥 청소를 해본다. 청소하지 않고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 솔을 잡은 김에 희윤이 실내화도 빤다. 집에서 책상에만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친정엄마는 '너도 고 서방처럼 좀 움직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 언니는 내 손을 보더니 '너는 애 셋, 낳기만 했어.'라고 했다. 남편이 하고 있는 집안 살림에 내가 신경 쓰면 끝없는 잔소리만 늘어놓을 것 같고 내 영역 아니라고 생각하니 싸울 일 없어서 좋았다. 지금은 언쟁할 때가 아니라 협력해서 정리할 때다.

1시 넘어서 올케가 잠이 든 예준이를 안고 들어온다. 내 사무실인 안방에 두 돌 지난 예준이가 누웠다. 조용히 거실로 나가 점심상을 차린다. 못다 한 설거지 때문에 식사가 더 늦어졌다. 올케는 꽃게찜을 사 왔고 우리는 닭찜을 시켰다. 손 작은 남편은 찜을 반 마리만 시켰단다. 어른이 몇인데 답답하다. 

식사를 끝낸 후 올케가 설거지를 시작한다. 안 해도 된다 해도 올케는 손이 빠르다. 


전실과 거실에 있던 책 중에서 예준이가 볼만한 전집 아홉 질을 꺼냈다. 비가 오고 있지만 남동생 차가 집 앞까지 왔으니 책을 가득 내어 준다. 책 좋아한다는 예준이 덕분에 고모인 내가 흥이 난다. 초등 1학년인 막둥이 희윤이는 그림책 단행본 위주로 보기 때문에 과감하게 예준에게 책을 내준다. 할부로 결제해서 갚느라 애썼던 책이었으나 조카한테 준다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다. 

예준이 옷 한 벌과 과자 사 먹을 용돈도 챙겨본다. 나는 고모니까. 선물하는 기쁨은 이런 느낌이구나.


급하게 집 정리도 했다. 옷장과 책장도 비웠다. 책장은 12칸의 공간이 남았다. 5단 책장 120센티미터 한 개를 버려도 되지만 책은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책장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내 방의 경우 베란다로 나가는 문을 막은 채 이중으로 3,4단 책꽂이를 비치한 상태다. 책은 넘친다.


집에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주방, 거실, 베란다, 욕실, 딸들 방 이러한 공간은 내 것 같지 않다. 안방과 안방 욕실 위주로 생활한다. 

동생 방문으로 반강제적으로 정리한 셈이지만 몸을 움직이니 머리는 맑아졌다. 이거 해야 하는데 저거 해야 하는데 생각만 많았던 스케줄을 떠올리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정리하면서 머리도 비운다.

라이팅 코치로 살게 되면 휴일의 개념은 줄어들 듯하다. 휴일마다 일할 목록을 메모해서 챙겼던 삶보다는 몸을 움직여 내 공간을 돌보는 일도 필요하다 싶다. 이번 연휴엔 계획한 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은 개운하다. 정리의 힘은 그냥 생긴 말은 아닌가 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오늘'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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