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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 Jan 25. 2022

햇빛과 바람으로 기르다

기다리는 날들

밭에 나가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은 것 같다. 내가 가보지 않은 밭에는 수확하지 않고 남겨둔 겨울 무들이 비닐을 덮어 만든 작은 하우스 안에서 이 겨울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대파들은 땅속 깊숙이 뿌리를 박은 채, 푸르던 이파리가 하얗게 질려있을 것이다. 비록 이파리가 하얗게 변하고 얼어도 땅속 깊숙이 박힌 뿌리는 살아남아 봄이 되면 파는 다시 자라날 것이다.     


양파 모종 심은 밭엔 등겨를 넉넉히 덮어주었으니 겨우내 가만히 있다가 봄이 되면 몸집을 키우리라. 나머지 휑한 밭엔 겨울바람만 지나고 있겠지. 텃밭을 하지 않았을 때는 휑한 겨울 밭을 보면 ‘아무것도 없네’라고 했겠지만 이젠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땅속에는 많은 식물의 씨앗이 잠자고 있다는 것을, 겨울동안 땅은 많은 식물의 씨앗을 가만히 보듬고 있다는 것을, 이젠 안다.     


집 안, 뒤 베란다엔 무청 시래기가 말라 버석거리고 있고, 앞 베란다 항아리 안에는 수확해 가져다 둔 무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여기저기 보내고도 김치 냉장고에는 김장한 김치가 아직 넉넉하다. 말린 고춧잎과 말린 호박오가리와 말린 가지는 냉동실을 차지하고 있다. 따자마자 냉동한 청양고추도 퍼렇게 언 채 냉동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서툰 농부의 겨울은 텃밭의 계절동안 쟁여놓은 작물을 하나씩 꺼내 먹는 계절이다.    


강의도 끝났고 성적 입력도 다 했으니 아주 잠시만 쉬어도 되는 날들이다. 조용한 겨울 집안 한낮, 일찍이 찾아든 햇빛은 거실 마루 위에 길게 누워있다. 햇빛이 거실 마루 깊숙이까지 찾아와 주니, 천장에 매달린 아이비에게도 바닥에 놓인 사파이어(식물 이름)에게도 선반 위에 놓인 스파티필룸에게도 겨울 햇빛이 넉넉히 내려앉을 수 있다. 다행이다.    


                                          햇빛과 사파이어


쨍하게 추운 날은 하늘이 새파랗고, 흐린 날은 수묵화 보듯 앞산이 아득하다. 바람이 불거나 눈발이 흩날리거나 무겁게 하늘이 가라앉는 날들이 계속된다. 방 안에서 전기난로를 쬐는 한겨울을 지내면서도, 흰나비 노랑나비가 날고 꽃을 찾는 벌들이 잉잉거리는 봄날을 생각한다. 밭 가에 무심히 피었다가 솜털 같은 씨앗으로 둥근 우주를 만들어내는 노란 민들레를 생각한다.    



겨울 속에서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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