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위해 먼저 챙겨야 할 것
의학용어 중에 바이탈 사인(Vital Sig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네 가지 지표인 체온, 맥박, 혈압, 호흡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활력징후 또는 생명징후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기능이 온전한지를 보여 주는 징후입니다. 이들 측정값을 통해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심장과 폐, 그리고 뇌의 각종 조절 중추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의학의 관점에서 위의 네 가지 생명현상은 생명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인 구성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숨이 붙어 있는 것 말고, 마음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지표도 있을까요?
아래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제시한 정신질환 진단의 지침인 DSM-5(The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에 따른 우울증의 진단 기준입니다.
- 다음 증상 중 5가지 이상의 증상이 거의 매일 2주 이상 지속되며, 그 증상 중 적어도 하나는 a.우울한 기분 또는 b.흥미와 즐거움의 상실 이어야 한다.
a. 거의 매일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
b. 모든 활동의 흥미와 즐거움 상실 또는 감소
c. 체중 감소(또는 증가) 및 식욕 감소(또는 증가)
d. 불면증 또는 과수면
e. 정신운동성 초조 또는 지연
f. 피로 또는 에너지 상실
g. 무가치감 또는 지나친 죄책감
h. 사고나 집중력 감퇴 또는 우유부단함
i. 반복적인 자살생각, 자살계획 또는 자살시도
식욕, 수면의 질, 피로감 등은 마음상태를 비교적 잘 반영하리라 생각되는 지표입니다. 우울증은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위의 진단기준은 우울증 환자와 우울증 환자가 아닌 사람을 가르는 용도라면 제법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의 결과를 분석하면 우울함 극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마음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마음건강을 구성하는 것들을 세로토닌, 도파민, 엔도르핀 같은 신경전달물질이라 정의한다면, 이는 마음을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으로 설명하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약물을 통해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함으로써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신경계를 조절하는 약물의 효과는 강력하며, 필요할 때는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마음건강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선 마음건강의 한 축이라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던 '행복'입니다.
'마음이 건강한 상태'를 행복과 동일선상에 놓아도 크게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꽁꽁 숨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행복은 닿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집니다.
"행복은 마음 안에 있어"
행복은 내 안에 이미 있다고, 생각을 한번 바꿔보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런 조언을 듣다 보면 내가 행복하지 못한 건 내가 부정적인 탓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반평생 행복을 연구한 서은국 교수는 진화심리학적 관점으로 행복을 조명한 그의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되는 생각을 자주 하라는 처방을 내리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지침들은 대부분 그렇다. ‘불행하다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손에 못이 박힌 사람에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과 비슷하다. 행복의 핵심인 고통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다”
행복이 생각을 바꿈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행복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서은국 교수는 ‘사람이 언제 행복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먹을 때’, 그리고 ‘사람과 함께 할 때’입니다.
수렵생활을 하던 그 옛날처럼, 우리의 뇌는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될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핵심을 요약하면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위 논리에 따르면 행복에 이르는 답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합니다. 이토록 간단한데 왜 마음처럼 안되는 걸까요?
조금만 노력을 들여도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맛볼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정말로 먹을 게 없어서 불행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배고프게 하는 것은 기아가 아닌 ‘관계의 빈곤’이라는 뜻입니다.
OECD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라는 주제로 조사를 했는데 노르웨이, 독일, 스페인, 브라질은 응답자 중 90% 이상이 도움을 청할 친구가 있다고 답했고, OECD 평균은 88.6%였다고 합니다. 한국은 75.9퍼센트로, OECD 회원국 중 꼴찌였습니다.
누군가와 마음으로 통하는 관계를 맺는 것. 마음 맞는 벗들과 편안하게 웃고 떠드는 것. 그게 어려워진 사회에 살고 있기에 많은 이들의 마음건강은 SOS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건강을 회복하는 열쇠는 ‘관계의 회복’에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를 유지한다면 건강한 마음은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겁니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오늘날의 인간관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집니다. 관계를 맺기도, 끊기도 쉬워졌습니다. 이렇게 관계의 개념이 새로이 정립되는 시대에, 모든 관계의 근본이 되고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관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나'를 객체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테지만, 관계 회복의 첫걸음은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옆에는 ‘너’가 있습니다. ‘너’는 가족, 친구, 선후배, 동료, 이웃 등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과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나의 마음건강에 좋은 보약이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관계의 범위를 논할 때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입니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곧 나의 신념, 가치관과 직결됩니다. 이 세상을 삭막하고 희망이 없는 곳이라 여기는 사람의 마음이 건강할 리는 없겠지요. 세계와의 관계는 나의 사고와 행동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들을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가꾸어 갈 수 있을까요?
한의학에는 사람을 진찰하는 방법으로 망문문절(望聞問切)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망(望)은 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환자의 안색, 눈빛, 혀 색깔, 체형, 걸음걸이 등을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문(聞)은 귀로 듣는다는 뜻이며, 코로 냄새를 맡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환자의 목소리나 체취를 진찰하는 것입니다. 문(問)은 질문을 한다는 뜻입니다. 언제, 어떻게 아프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소화, 대변, 수면의 상태, 그리고 직업, 생활습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정보를 파악하는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절(切)은 눌러보고 만져본다는 뜻입니다. 맥을 짚고 아픈 곳을 의사의 손으로 만져 보며 진찰하는 방법입니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도 하나의 유기체(organism)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장기(organ)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룬 것이 몸이라면, 사회 또한 많은 기능적 단위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거대한 조직(organization)입니다. 그러므로 인체를 치료하는 것처럼,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병리적인 부분 또한 진단과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한의학적 진단원칙인 망문문절의 틀을 빌려서 나와의 관계, 너와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를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