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우리에게 주었던 선물들은 언젠가 다시 돌려드려야 합니다.
87세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대장 여러 군데에 생긴 동정맥 기형으로 장출혈이 반복되는 상황이었지요.
대장내시경 레이저로 출혈 부위를 지졌지만,
적혈구 수치는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렵지만 꼭 해야 하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할아버지, 지금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병원에서는 미리 여쭤봐야 하는 게 있어요.
혹시 심정지나 호흡 정지가 오면… 심폐소생술을 원하시나요?”
할아버지는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죽고 싶지 않아!”
“지금 돌아가실 것 같아서 여쭙는 게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는 절차예요.
저도 할아버지가 오래 사시길 바라죠.”
그러자 할아버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으셨습니다.
“지금 안락사 이야기 하는 거야? 죽기 싫다니까…”
옆에 있던 따님은 마스크 너머로 살짝 미소 지었습니다.
제가 설명을 잘못해서 생긴 오해는 아닌 듯했습니다.
그저, 나이와 상관없이 ‘죽음’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낯설고 두려운 법이지요.
⸻
다른 층에서는 또 다른 회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80세 이탈리아 출신 할머니였습니다.
며칠 전 숨이 차 입원하셨고,
CT 결과 폐 전체를 뒤덮은 수많은 전이성 병변이 보였습니다.
이미 만성폐쇄성 폐질환으로
집에서도 산소를 달고 생활하던 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치료 대신 호스피스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은 퇴원을 앞두고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Sorry for the crazy Italian family talk.”
“괜찮아요, 할머니. 가족분들이 걱정돼서 그러신 거겠죠.”
할머니는 잠시 웃으시더니 조심스럽게 부탁을 꺼내셨습니다.
“나 소변 기계를 아마존에서 주문했는데 목요일에 온대요.
병원 거 가져가도 되면, 내 거 오면 꼭 돌려드릴게요.”
그때는 무슨 말씀인지 정확히 몰라
수간호사를 불러 함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노련한 간호사는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건 purewick catheter,
요도에 삽입하지 않고 외부에서 부착해 소변을 받아내는 기계였습니다.
간호사는 다정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괜찮아요, 할머니. 집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그 순간,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아무 때나 소변이 나와서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주방에 서 있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아들은 내 상황을 이해 못 할 거예요.”
말을 잇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할머니는 야위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손길로 제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나 오늘 퇴원하면 Dr. W한테 인사도 못하고 가네요.
병원에서 다들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숨이 차 힘드실 텐데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그분의 얼굴에서
저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배웠습니다.
곁에 있던 흑인 간호사가
백인 할머니를 꼭 안아드리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만연한 갈등조차
이 순간만큼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우리는 걷는 법을 배우고, 대소변을 가리고,
몸의 기본 기능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평생 그것을 ‘당연한 능력’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늙어간다는 건
그 당연했던 능력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부모님이 감당한 수고와 희생처럼,
그 능력들은 사실 **신이 우리에게 ‘댓가 없이 빌려준 것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이제 그 능력을 반납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슬픈 일인 동시에,
자연의 순리에 따른 평온한 귀향이기도 합니다.
⸻
그날, 제 마음은 오랜만에 따뜻했습니다.
마음이 저절로 기도처럼 흘렀습니다.
“신이 주신 능력을 이제 돌려드릴 시간이 왔습니다.
그분이 평안히 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