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우리 집안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누군가는 평범하다고 말하겠지만,
그 속에는 세대를 넘어 이어진 상처와 인내,
그리고 기도로 이어진 숨결이 고요히 흐른다.
이 집안의 시작에는 언제나 외할머니의 기도가 있었다.
이른 새벽, 장작 냄새가 스며든 찬 공기 속에서
외할머니는 잠든 아이들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기도하셨다.
그 손끝에서, 이 가족의 이야기는 이미 방향을 정해놓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많은 형제자매 중 한 분으로,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다.
공부보다는 생존이 먼저였던 시절,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했고
언제나 “집안의 아픈 손가락”으로 불렸다.
그런데도 그는 묵묵했고, 성실했고,
세상이 주지 못한 평온을 스스로 지켜냈다.
어머니는 시골 농부의 넷째 딸이었다.
집안 어른들은 “순하고 말 잘 들 것 같은 사람”이라며
그분을 며느리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놀라울 만큼 총명했고,
잔소리 대신 격려로 자식을 키웠다.
그 믿음의 방식이 결국
“배움의 길을 걷는 자식들”이라는 반전의 역사를 만들었다.
집안의 몇몇 어른들은 놀랐다.
그들은 우리가 겸손해서 조용한 줄 알았지만,
그 조용함이 힘이 될 줄은 몰랐다.
놀람은 곧 질투로,
질투는 냉소로 바뀌었다.
내가 장래의 꿈을 이야기했을 때,
어떤 어른은 내 말을 자르듯 말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너는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은 공기보다 차가웠다.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어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심장이 요동쳤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폭발 직전의 나를 붙잡은 건,
옆에서 조용히 이 모욕을 버텨내고 계신 어머니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의 눈빛을 봤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괜찮다. 우리까지 무너질 필요는 없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 어른은 인지 기능이 떨어지고,
소화 기능도 약해져 유동식만 겨우 드신다.
한때 체면과 서열로 세상을 재단하던 분이,
지금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식사조차 어려운 노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늘 “부끄럽다”며 고개 숙이던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잘 드시고,
조용히 웃으며 하루를 살아간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참 안 됐다.
그래도 네 아버지는 행복한 사람이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는 세월을 견디며,
비교와 체면의 시대를 통과하며,
결국 이 면류관을 쓰신 분이었다는 것을.
그 면류관은 남보다 잘 살아서가 아니라,
끝까지 사람답게 버텨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새벽마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던 외할머니의 손끝에서,
그 믿음의 불씨가 우리에게로 이어졌다는 것을.
아버지의 면류관은 빛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아래에는, 아버지가 살아내야만 했던 세월의 상처로 생긴 굳은살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나는 안다.
이 행복의 표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버텨야 했는지,
그래서 행복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 아름다움 속엔 아직도 조금의 아픔이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