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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Oct 26. 2023

마스크가 그립다니


마스크라면 진저리가 난다. 안경을 쓰는 데다가 날이 추워지면 콧물을 닦아내기에 바쁘다. 그런 사람에게 마스크란 정말이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마스크가 그립다. 아니, 마스크를 넘어서, 복면가왕에 나오는 그런 복면이 절실하다.


   우리 학교 친한 선생님들은 나만 보면 이렇게 묻는다. “작년 부장이 괜찮아, 지금 부장이 괜찮아?” 극강의 밸런스 게임이다. 어떤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런 것이다. 멍청한 시아버지가 좋아, 똑똑한 시어머니가 좋아? (이후 언급되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관한 발언들은 시댁 식구들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절대 아님을 밝혀 둔다. 다만, 한국 사회에 통용되는 시댁 식구에 대한 이미지에서 차용하였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사실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솔직히 둘 다 별로이고 힘든데, 굳이 골라야 하나 싶다. 굳~~이 고르라기에 최근까지는 똑똑한 시어머님을 고르긴 했다. 뭐 하나라도 배울 게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주부터 대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똑똑한 시어머님의 눈칫밥이 얼마나 매서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시간제기간제로 일한 것을 몰랐던 똑똑한 시어머님이 나의 퇴직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퇴직금이 이 정도이니 남는 예산을 살펴보라 명했다. 퇴직금 마련을 위해 강사 선생님들의 수업을 줄이라는 이야기까지 하셨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퇴직금은 보이지를 않는다. 강사 선생님들의 쥐꼬리만 한 월급을 빼앗아 퇴직금으로 삼는 건 더 싫다. 돈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러는 건, 너의 퇴직금을 고민하는 게 싫어, 왜 작년부터라고 말을 안 했니, 운영위원회에 들어가서 너 따위의 퇴직금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 표현이리라.


   게다가 교육청 장학사는 학교끼리 ‘한국어학급 시간제기간제’를 1년마다 교환하라는 이야기까지 했단다. (참고로 우린 1년 단위 계약이 드물다. 보통 2학기 말 계약종료라, 학교별로 1년만 채용하면 퇴직금이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가 물건인가. 물물교환하게. 어쨌든 장학사의 물물교환 발언까지 나에게 전한다는 건, 너는 내년에 우리와 함께하지 못할 거야. 그런데 너에게 2월에 있는 징검다리 과정은 시켜야 해. 어쩔래? 이런 의미이려나.


   하여튼 이 며느리가 경험도 많고, 일을 못 하진 않으니, 일단은 두는데 미치겠나 보다. 게다가 본인이 2월에 있을 징검다리 때문에 나와의 계약을 1년으로 잡아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이래저래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걸 느끼는 나는 가시방석이고. 아 작년 시아버지는 위아래층에 살아도 분가를 한 경우라면, 이건 한집에 사는 경우라 더 그렇다. 때론 숨소리로도 짜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최근 또 공문이 하나 내려왔다. ‘한국어 학급 운영교 승진 가산점’ 추천서를 내란다. 한 학교당 정원의 10%까지 받을 수 있고, 최대 3명을 넘길 수는 없다. 우리 학교는 3명까지 가능하다. 참고로 부장님과 한국어학급 담임인 정교사 선생님 1명, 그리고 시간제기간제인 나까지  업무 담당자는 딱 3명이다.


   앞에 정교사 선생님이 우리 부서가 3명이라 3명 내용을 작성해 뒀다고 하니, 부장이 옆으로 다가가 몸을 잔뜩 숙여 속삭인다. 사람 앞에 두고 뭐 하는 거지.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 몸을 일으키며, 슬쩍 그런다. “달팽이는 승진 대상자가 아니잖아.” 승진 대상자는 아니지만, 지침에 내려온 업무 중 상당 부분을 제가 담당하는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애꿎은 자판만 두드린다.


   어쨌든 이 업무를 담당해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사 중에 승진 가산점을 받고 싶은 사람들의 경쟁이 치열한가 보다. 듣기론 작년 시아버님이 자기에게 점수를 달라고 논쟁에 불을 지폈단다. 모든 이들의 선택지에 ‘나’란 존재는 애초에 없다.  


   다른 학교 시간제기간제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자기네는 담당자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다고, 선생님에게 주겠다고 했단다. 그게 맞는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쌤이, 자긴 그런 것보다 실질적인 운영에서 배려해 달라고, 점수는 다른 분께 줘도 상관없다고 했단다.


   그래, 내가 서운한 건 정확히 그 지점이었다. 나에게 물어봐 주지 않는 것. 물어보면 누가 덥석 받는다나. 어차피 정교사가 아니라 1도 쓸모없는 점수 따위, 걔나 줄 텐데. 다들 걔가 아니 개가 되기 싫은 게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절대로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계속 속삭이는 모습들. 밖에 나갔다 오면 오가던 말이 끊기는 그런 분위기. 교육청 행사나 프로그램에 어떻게 해서든 나를 빼고 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니 슬슬 얼굴이 굳어진다.


   평소 늘 하던 대로 부장이 담당자로 되어 있는 문서를 작성하는 것뿐인데, 오늘따라 승질이 난다. 그런 잡다한 거나 하는 하찮은 존재 같아서 서러워진다고 할까. 게다가 그런 감정이 여과 없이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라, 나도 돌겠다. 일단 이 삐죽거리는 입술과 떨리는 볼이라도 가리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말이다.


   마스크가 그립다니. 그토록 진저리 치던 마스크가 절실한 날이 오다니. 얼굴이 티타늄 합금으로 되어, 견고하면서도 변함없는 미소를 보여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침대 같은 평정심을 가졌으면 싶다. 아니, 사실은 마스크도, 티타늄 합금도, 침대도 다 필요 없다. 스스로 자기의 퇴직금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원래 받아야 할 것을 빼앗기지 않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주 많이 그렇다. 오늘은.   


#쓰고뱉다

#100일의글쓰기시즌2

#쉰두번째

#에이뿔조(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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