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이 되어 보아요
옛날 옛날에, 말숙이 친구 말희가 있었어요. 그녀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었어요. 아니, 선생이 왜 자꾸 비정규직 동화에 끼어드냐고요?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학교에서 발에 채는 게, 바로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거든요, 말희처럼요. 그중에도 말희의 과목인 국어는 경쟁이 치열했어요. 말희는 비록 10개월짜리지만, 그 자리가 참 소중했어요.
소중한 자리다 보니, 어떤 업무가 날 향해 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죠, 지금처럼요. 지금은 점심시간이지만, 말희는 교문 앞에 서 있답니다. 왜냐고요? 교문 지도를 해야 하거든요.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녀는 교문 지도를 했어요. 지각하는 학생부터, 치마를 줄인 학생, 외출증 없이 학교 밖을 나가는 학생을 모두 잡아내곤 했죠.
그날도 점심을 후다닥 먹은 말희는 교문 앞에 서 있었어요. 어라, 교문 앞에 웬 자동차가 다가와요. 원래 다른 학생들을 위해서 교문 앞 주차는 금지예요. 게다가 노랑 카디건에 실내화를 신은 아이가 내려요. 설마 싶은데 말희 앞으로 들어와요. 얘야, 잠깐 서 보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져요. 어디 갔지.
갑자기 말희 눈앞에, 아까 자동차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오신, 지 부장님이 보이네요. 지 부장님이 갑자기 말희 앞으로 오더니 그러세요.
“아이고, 김 선생. 수고가 많아요. 쟤는 나랑 자전거 타고, 내 심부름 다녀왔어요.”
“아, 네. 부장님, 안녕하세요. 그래도 잠깐, 학생이랑 이야기만 좀 하면 안 될까요?”
“거참, 나랑 나갔다 왔다니깐.”
“네, 혼내는 거 아니고, 그냥 이름만․”
‘물어보려고요.’란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어요. 지 부장이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너 따위가 뭔데, 나를 이렇게 개망신 주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부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니가 뭔데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냐며, 쟤는 내 친구 딸인데, 내가 쟤네 아빠한테 뭐가 되겠냐며, 니 따위가 나를 개망신 준다고 말이죠.
말희와 지 부장 주위로 학생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어요. 당연하죠. 맨날 교문 앞에 서서, 자기들을 지적하던 말희가 지 부장한테 깨지니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이에요. 말희는 순간, 김말이가 되어, 또르르 누군가의 입속으로 말려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말희는 김말이가 아닌 김말희였어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김말희 말이죠.
그래요, 말희는 눈치가 드럽게 없었던 거예요. 그깟 아이 하나 그냥 눈감아주면 될 걸, 노랑 카디건 따위는 모른 척해 줄걸, 그걸 굳이 콕 집어내 이 사달을 만든 거예요. 교문 앞에 서서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하겠다는 거 따위는 또르르 집어넣어 둬야 했어요. 하늘같은 부장님 앞에서는 말이죠.
교문 지도가 끝나고, 자리에 돌아와 앉은 말희는, 더 굴러갈 곳이 없었어요. 이제 수업에 들어가야 했거든요. 오늘의 수업은 ‘꺼삐딴 리’네요. 일제강점기부터 50년대까지,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끝까지 살아남은 이인국 박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에요.
말희는 네가 되어 교문에서 깨지고서야 깨달았어요. 아까 교문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꺼삐딴 리, 아니 꺼삐딴 킴이 됐어야 했다는 것을. 지 부장님의 체면을 위해, 그깟 교문 앞 주차와 노란 카디건, 실내화 따위는 모두 눈감아줬어야 했다고. 아니, 노란 카디건도 남색으로 볼 줄 아는, 카멜레온 같은 눈을 가졌어야 한다고 말이죠.
꺼삐딴 리처럼 카멜레온이 되지 못한 말희는, 그렇게 교문 앞에서 깨지고야 말았답니다. 오늘의 동화 끝.
비정규직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내일은 ‘쓰는 인간’님의 잔혹동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