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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 탄 달팽이 Aug 21. 2021

초코파이는 정(情)이 아닙니다

선생님, 저 초코파이 먹으면 죽어요

“선생님, 이거 돼지고기 있어요. 돼지고기 먹어요. 나 죽어요.”


한국어 학급 무지개 C반 수업이 끝나고 난 후, 초코파이를 나눠줬을 때의 일이다. 무하마드(가명)가 정색하며, 자기는 이걸 먹으면 죽는다고 한다. 초코파이에 돼지고기가 들어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성분에 명시돼 있는 돼지고기가 이제야 눈에 띈다.


초코파이 상자 측면에 명시돼 있는 성분표시. ‘돼지고기’가 눈에 띈다.


무하마드, 미안해요. 선생님이 정말 몰랐어요. 다른 거로 줄게요.”


   학교에서 받은 아이들 간식 꾸러미를 뒤져본다. 마이쮸, 미왕 쌀과자 등에 모두 돼지고기가 들어있다. 성분 표시에 돼지고기가 없는 것을 골라 아이들에게 건넨다. 아이들은 겨우 뗀 한글로 연신 과자 뒤를 살피며, ‘돼지고기’가 쓰여 있는지를 확인한다.


“이건 돼지고기가 없어요. 괜찮아요. 선생님이 확인했어요.”


   그 이후로 아이들과 1년 정도를 생활하면서 모슬렘 아이들이 한국에서 많은 것을 먹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돼지고기만 먹지 않는 아이들부터, 고기가 들어간 모든 것을 먹지 않는 아이, 유제품까지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꼭‘할랄’ 인증 표시가 있는 간식만 먹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구매하여 지급하는 간식에는 할랄 제품이 없었기에 사비(私備)로 할랄 제품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대부분 무하마드처럼 돼지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먹거나 할랄 표시가 없는 음식을 먹으면 죽는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아마도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한국어가‘죽는다’여서 그렇게 표현한 거 같다. 모르고 먹으면 괜찮은데, 알면서 돼지고기를 다섯 번 먹으면 죽는다고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때때로 이슬람 문화와 한국 문화가 충돌하는 데서 빚어지는 갈등도 있었다. 일단 아이들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나란히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몇몇 고학년 남자아이들은 은연중에 같은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면 같은 모슬렘 여자아이들은 순종적으로 시키는 일을 하곤 했다.


   문제는 원적학급에서 같은 한국인 여자아이들에게 비슷한 일을 했을 때 나타났다. 당연히 한국인 여자아이들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고, 이런 소소한 갈등이 종종 일어난다고 담임 선생님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셨다.


   한국어 강사인 나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를 설명해 주고 싶었다. 한국 문화 속에서 친구끼리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또래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 한국의 또래문화는 어떠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문화가 아이들의 문화와 상충하는 지점이 있을지라도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실마리를 잡아가도록 아이들에게 일러주고, 보여줘야 했다. 우리에겐 초코파이가 정(情)인 것처럼, 그들에게 정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초코파이가 정이 되었던 건, 그 옛날 제품의 CF 때문이었다. 당시, CF 속 여자 주인공이 몸이 아파 삭발을 하게 되었고, 주인공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 역시 삭발을 하고 나타난다. BGM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가 잔잔히 흐르면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情)’. 결국 내가 가르쳐야 할 정(情)이란 건, 서로를 향한 진심(眞心)이란 건, 낮은 자리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서 싹트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1년 동안, 난 초코파이가 아닌 할랄 인증 표시가 된, 멘토스를 건네며, 아이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을 몸소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나의 진심을 건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쯤이었다. 아이들이 언제 방학을 하냐, 언제 쉬냐고 물었다. 12월 25일에는 크리스마스라서 쉰다는 나의 말에 아이 한 명이 말했다.


그날은 예수 생일이야. 좋아하면 안 돼. 예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래.”


그 아이의 말에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국어 강사가 아닌 나로서의 대답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대답을 건네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이들에게 ‘잼 쿠키’를 구워서 선물했다.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재료로 구운 쿠키를 통해,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사랑을 나눠주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내 방식으로 건넨 ‘정(情)’이고, 사랑이었다. 전하고 싶은 진심(眞心)이었다.


   아이들과 생활을 하며, 문득문득 개인으로서의 나와 한국어 강사로서의 나 사이에서 멈칫거릴 때가 많았던 거 같다. 그때마다 떠올린 건 멋모르고 아이들에게 건넨 초코파이였다. 아이들에겐 초코파이가 정(情)이 아니었다. 먹을 수 없는 위험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정을 보여주고 싶은, 한국어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에게서 낯선 문화를 발견할 때마다, 그 문화가 너무 이질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모슬렘 아이들에게 무심코 건넨 초코파이를 떠올린다. 어느 순간 튀어나오는 나의 언어를 집어삼킨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크리스마스 때 모슬렘 아이들에게 건넨 쿠키를 떠올린다. 그저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보여준 나의 마음을, 말보다 앞섰던 행동의 언어를 떠올린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아이들 앞에 진심을 전하는 한국어 강사로, 선생님으로 오롯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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