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빨간, 이

by 자전거 탄 달팽이


이게 대학 보내 놨더니, 빨갱이 집단에 들어가? 당장 그만둬.”


대학교 학보사에 들어간 내게, 사진 씨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기자가 되고 싶은 나의 열망은 매우 강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제법 똘똘했던 나를 좋게 보셨던 신문사 간사님이, 사진 씨와 성심 씨를 설득해 주셨다. 난 그렇게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학보사는 실제로 전국대학생기자연합(이하 전대기련)이란 단체에 소속되어 있긴 했다. 학보사 기자가 되면, 기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가입되는 시스템이랄까. 내가 속한 학보사 국장이 그 지역 지부장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도 국장의 말처럼, 그즈음 내 이름은 정말, 경찰관 아저씨 빨갱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온 사방이 네 이름은 빨갱이 리스트에 올라있다고 외쳐도, 나는 내가 절대 빨갱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더 빨간, 아니 빨갛다고 여기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소속 학생회장들과 매번 으르렁댔기 때문이다.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시위를 할 때도, 매 학기 그들의 공약 이행을 평가할 때도 펜을 마구 휘둘러,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가, 결국 무지막지한 빨간 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뒤였다. 당시 대학종합평가를 앞두고 대학 본부 직원들은 매우 바쁘고 예민했다. 난 평가 항목 중 하나인, 우리 대학 학생들의 중도 이탈률을 조사하여 원인을 분석하고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기사를 기획하고 있었다.


군 복무나 병가, 어학연수 등의 이유가 아닌, 다른 여타의 이유로 휴학을 하는 학생 비율, 자퇴 학생 비율 등을 조사하러 본부에 갔고, 본부 직원은 예민한 문제라 자료를 주지 않았다. 자료를 주지 않는 직원에게, 나보다 족히 나이가 열 너덧은 많아 보이는 그분에게 난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학생들의 알 권리를 무시하냐며, 질러대는 무례한 나의 고함과 삿대질 앞에 결국 직원은 나에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알 권리를 운운하며 자료를 받아 챙긴 나는, 오히려 학생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사를 써내지 못했다. 다만, 그 이후, 알량한 펜 하나를 쥐고, 거만하게 그것을 휘두르며 온 사방을 찔러대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 펜 끝에 잔뜩 붙은 타인들의 피를, 그 피로 빨갛게 물든 나의 글을. 아, 나는 빨간, 이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더 빨간, 이가 되기 전에 나는 학보사를 그만뒀고, 기자란 꿈도 접었다. 그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젠 제법 따스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빨간 이가 진짜 아니라고 말이다.


얼마 전, 한국어 학급에 오는 학생 하나를 선도위원회에 회부하게 됐다. 아이는 한국어 학급에 와서 자기가 가진 반항기를 마구 뽐내곤 했다. 부모님 앞에서도, 원적 학급 담임 선생님 앞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뽐내지 않는 그 반항기를 꼭 내 앞에서만 뽐냈다. 무선 이어폰을 한쪽만 끼고도 수업을 들을 수 있다며, 내가 수업만 시작하면 본인 나라의 언어로 무지막지하게 떠들어대며, 학습지에는 낙서만 해대며 그렇게 반항을 했다.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이 침해된다는 명목 아래, 나는 펜 대신 자판을 휘둘렀다. 의견서에는 내가 그동안 담임선생님과 다문화 담당 선생님들께 보낸 쿨메신저 속 메시지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정중하고 친절한 언어가 적혀 있었다. 다만, 그 정중함과 친절함 사이로 아이를 향한 미움·분노·원망·질책 같은 것들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를 선도위원회에 회부하는 의견서로 완벽하게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 글을 맞닥뜨린 이후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서랍 속에 넣어둔 글들만 겨우 꺼내어 옮길 뿐이었다. 내 펜 끝에는, 내 자판에는 다른 사람의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처 내고 갈기갈기 찢어낸 그 펜 끝, 그 펜을 쥔 나는 지독히도 빨간 이었다.


여전히 빨간 이었으면 좋겠다. 다만, 그 펜 끝에 묻은 피가 다른 이의 피가 아닌, 나의 피였으면 좋겠다. 언제든 그 펜 끝이 나만을 향하기를 바란다. 나는 빨간 이다.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찌르는, 펜 끝이 온통 나의 피로만 물든, 그런 빨간 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언젠가는 그 펜 끝이 그 누구의 피도 아닌, 따스함의 온도로 발갛게 물든, 그런 빨간 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따스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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